♧ 금백조로
제대로 가는 건가
길 없는 길의 시간
독촉장 들이밀듯 후려치는 갈바람에
한사코 고개를 젓는
억새 무릴 보았다
펼쳐본 적 없는 꽃잎 질 것 없어 좋으니
한 립 한 립 홀씨가 곁을 져도 좋으니
오름과 오름 사이에
누운 채로 살 거다
내가 그대에게
그대 내게 오는 동안
뛰지 마라
뛰지 마라
생탯줄 끊지 마라
해 돋는 쪽으로 굽은 길이 여기 있으니
♧ 직진형 알몸뚱이로
전생에 우리는 어쩜 자매였을 거야
지렁이 굼벵이 달팽이 그리고 숙이
귀 익은 돌림자 이름 여태 함께 쓰면서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모습
가을볕 푸짐한 텃밭 얼갈이 옆에 모여
생생한 오체투지로 수다 늘어놓는다
땅속이나 밖이나 산다는 건 똑같구나
젖은 데 마른 데 가려낼 틈도 없이
직진형 알몸뚱이를 앞으로만 굴리는
♧ 설마 했는데
가을에 섬겨야 할 건
물드는 저 마음이다
붉은 빛 노란 빛
망설이는
감잎의 살갗
숨겨온 나의 과거가
찍혀있을
줄이야!
♧ 물영아리오름
여기, 여기였구나!
우리생의 발원지가
사랑을 거두고도 가두지 않는 샘
삼백여 계단을 올라
섬 자궁을 만난다.
반의반의 반 박자
무채색 심장소리
뭍별 잉태한 곳이 정녕 저러할 거
그 속에 얼비친 세상
나를 품고 있구나.
♧ 서리
저만한 결단이라야
새봄을 맞는구나
뜨겁게 쏟은 입김
새벽 한때 피는 꽃
밭두렁 왈칵 들고 선
촛농들을 보았다
♧ 나뭇잎 비문
살아내기 위하여 바둥바둥하던 이
이슬 머금은 채로 흔들리다 반짝이다
낱낱이 백골 드러낸 나뭇잎을 보았다
떨어져서 수백 번 마르고 또 젖으며
잎맥과 잎맥 사이 관계 탈탈 털어도
살아서 내세울 것이 딱히 없는 갈음을
산다는 건 몸속으로 길을 내는 거란다
가로 세로 막 얽힌 우여곡절의 저 사설
흙 위에 살포시 누운 빈칸들을 읽는다
*김정숙 시집『나뭇잎 비문』(책만드는집 시인선 132, 2019)에서
*사진 : 팥배나뭇잎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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