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정숙 시집 '나뭇잎 비문' 2

김창집 2019. 10. 24. 11:01


금백조로

 

제대로 가는 건가

길 없는 길의 시간

독촉장 들이밀듯 후려치는 갈바람에

한사코 고개를 젓는

억새 무릴 보았다

 

펼쳐본 적 없는 꽃잎 질 것 없어 좋으니

한 립 한 립 홀씨가 곁을 져도 좋으니

오름과 오름 사이에

누운 채로 살 거다

 

내가 그대에게

그대 내게 오는 동안

뛰지 마라

뛰지 마라

생탯줄 끊지 마라

해 돋는 쪽으로 굽은 길이 여기 있으니

    

 

직진형 알몸뚱이로

 

전생에 우리는 어쩜 자매였을 거야

지렁이 굼벵이 달팽이 그리고 숙이

귀 익은 돌림자 이름 여태 함께 쓰면서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모습

가을볕 푸짐한 텃밭 얼갈이 옆에 모여

생생한 오체투지로 수다 늘어놓는다

 

땅속이나 밖이나 산다는 건 똑같구나

젖은 데 마른 데 가려낼 틈도 없이

직진형 알몸뚱이를 앞으로만 굴리는



설마 했는데

 

가을에 섬겨야 할 건

물드는 저 마음이다

 

붉은 빛 노란 빛

망설이는

감잎의 살갗

 

숨겨온 나의 과거가

찍혀있을

줄이야!

    

 

물영아리오름

 

여기, 여기였구나!

우리생의 발원지가

사랑을 거두고도 가두지 않는 샘

삼백여 계단을 올라

섬 자궁을 만난다.

 

반의반의 반 박자

무채색 심장소리

뭍별 잉태한 곳이 정녕 저러할 거

그 속에 얼비친 세상

나를 품고 있구나.

    

 

서리

 

저만한 결단이라야

새봄을 맞는구나

 

뜨겁게 쏟은 입김

새벽 한때 피는 꽃

 

밭두렁 왈칵 들고 선

촛농들을 보았다

 


나뭇잎 비문

 

살아내기 위하여 바둥바둥하던 이

이슬 머금은 채로 흔들리다 반짝이다

낱낱이 백골 드러낸 나뭇잎을 보았다

 

떨어져서 수백 번 마르고 또 젖으며

잎맥과 잎맥 사이 관계 탈탈 털어도

살아서 내세울 것이 딱히 없는 갈음을

 

산다는 건 몸속으로 길을 내는 거란다

가로 세로 막 얽힌 우여곡절의 저 사설

흙 위에 살포시 누운 빈칸들을 읽는다

 

 

         *김정숙 시집나뭇잎 비문(책만드는집 시인선 132, 2019)에서

         *사진 : 팥배나뭇잎의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