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대 시
♧ 아침 편지 – 강방영
삶의 만남과 이별의 되풀이라고 한다면
아침에 차를 열다가 받는 색다른 편지
작은 쪽지처럼 차창에 남긴 부드러운 솜털도
밤사이 머물던 나무를 떠나면서
가볍게 유리 위에 얹은 작별의 말 같아
정한수 대접 물에 목을 축이고 불전처럼
잠시 내려앉았던 제단에 새가 남겼던 작은 털도
곳곳에 이어지는 만남과 작별의 흔적들은
아프게 헤어지고 나면 더 눈에 띄는가 봐
끝없이 실 뽑아내는 누에처럼 이어지는 작별을 통해
삶은 의미에 또 다른 의미를 이어가면서 비단을 짜는가 봐

♧ 꺾꽂이 - 고성기
이른 봄 볕바른 날
능수매화 향에 취해
늘어진 가지
싹둑 잘라
젖은 땅에 고이 꽂다
언제면
뿌리 내릴까
기다림이 먼저 싹트다
오늘따라 어머님이
왜 웃고 서 계실까
탯줄 잘라 품에 안을 때
매화만큼 아팠을까
일 년간
출생신고 미루며
멍울로 핀 조바심

♧ 코로나 블루 – 나기철
청소하다가
자잘히 예민해지는데
아내가 뭘 사오라 해서 나가니
마스크를 안 가져왔다
편의점에 들러
마스크 한 봉지 꺼내
판매대로 가니
주인인 듯 나이 좀 든
덩치 큰 남자가
왜 반말 써요?
반말 안 하고 중얼거렸는데요?
원 플러스니 하나 더
가져 오란다
가져 와 아래 놓으니
왜 탁탁 놓는 거요?
참 예민하시네요
이 남자 아침에 아내와 다퉜을까
아이들 때문일까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을까
심약해 좀 예민한 이일까
코로나 2년에
코로나 블루에 휩싸인 걸까
나도 그런 걸까

*회원 시
♧ 꽃을 위한 예언서 - 강영은
초저녁별과 나 사이, 꽃잎 위를 기어가는 투구벌레의 등이 꼭짓점이다. 제 등이 꼭짓점인 지 모르는 황금 갑옷이 반짝일 때마다 막 피기 시작한 꽃잎이 휘어진다
곡선을 봉인한 날개 속에 죽음이 유지되기를 원할 뿐, 꽃잎을 덮고 있는 어둠을 보지 못한 당신은 에게해의 하늘을 건너 온 별빛이라고, 노래한다
핀다는 것은 경배 받는 자이며 경멸 받는 자의 노래
대지가 받아 적는 어둡거나 환한 문장이라는 걸, 나는 말하지 못했다
순간의 영원 같은 꽃의 화엄에 양 날개를 묻은 투구벌레처럼 당신은 영원히 입을 다물 수 있나,
사랑에 대한 최초의 예언서는 알지 못하지만 삼각형의 문장을 접는 당신의 입속으로 붉은 모가지가 툭, 떨어진다
곡선으로 피었다 곡선으로 지는 꽃,
태양의 문신을 몸에 새긴 투구벌레는 검게 빛나는 도리아식 기둥을 숭배할지 모르지만 꽃의 신전을 삼킨 당신을 나는 지평선이라 부른다

♧ 붓꽃 – 김순국
-붓을 고쳐 잡으며
붓 들면 제 세상인 시인의 분신인가
은유와 직유의 바다 시어를 낚아내는
나비의 날개 문양이 꽃잎 속에 나풀댄다
“붓 대신 무릎을 꺾고 꽃 앞에서 울었다”*
십 수 년 아려왔던 시 한 수를 되새기며
나 여기 붓꽃 앞에서 붓을 고쳐 잡는다
---
*고정국 시조 「붓꽃」 종장 차용.

♧ 동백꽃 - 김순이
아름다운 사랑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별리가 있을 뿐
겨울, 동백꽃도 그러하다
핏덩이 같은 꽃송이가 툭툭
통째로 미련 없이 진다
가장 아름다울 때 나무를 떠난다
그건 꽃 피게 해준 뿌리와 대지에 대한
감사의 입맞춤이다
단단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청춘을 절제하는 향기로운 몸짓이다
* 동백문학회 간 『동백문학』 2021 창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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