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비 채집
우리나라의 나비들은
풀꽃 냄새가 난다.
철창 속에서
자유의 칼을 갈던 형제들 모두
수자리 살러 떠나고,
저 금빛 강물에
꽃잎을 띄우는 애인들만 남아서
자유를 서성거리는
여울 가에 풀꽃이 피어
나비 나는데
가냘픈 날개에 맺혀 있는
방울방울 풀꽃 냄새.
미국산 파이프의 연기로 피어오르는
언어의 난봉에도
죽어 사는 소시민의 마음에도
주민등록증에도
풀꽃 냄새가 난다. (1976)

♧ 갈색 우산 속의 삽화
꽃잎을 뜯고 싶어
꽃가게에서 꽃을 샀다.
꽃은 가난한 사람에겐 사치라 생각했다.
아파트 여자의 꽃꽂이를 증오했다.
이제 그대 떠나고
홀로 꽃을 저주하는 나이
치약처럼 짜 누르면
서른셋의 앙금이 고인다.
세월이 흘러 이렇게
서글픈 연령이 되었을 때,
가난과 설움이 꽃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면
깨어진 항아리에 수국 한 아름
꽂아두고 싶다. (1982)

♧ 가볍게 쓴다
지금은 가볍게 쓴다.
핏빛을 지워 연분홍 사랑으로 가볍게 가볍게 쓴다.
죽은 시신들은 유채밭에 묻어두고 노란 꽃물 들이며 쓴다.
유채꽃은 피에 젖고, 돌담에 매어다 쳐 죽인 아기와
아기무덤에 앉아 울던 까마귀의 4․3의 들판은
절대로 잊어야지 하며 가볍게만 쓴다.
정부미 곤밥에 눈물을 섞는 그 날 할머니의
추운 겨울은 더 이상 거론도 말아야지,
배고파서 미친 그 날 할아버지가
썩은 말에 괸 구더기를 주워 먹었다던 부끄러운
이야기는 절대 잊어야지 하며
한라산을 바라본다.

♧ 부끄러움의 시
나의 우상은
가을 코스모스와 녹슨 도마칼
사랑과 증오의 날을 세워
칼을 갈면서
비오는 날이면
꺼이꺼이 울고도 싶었더라.

♧ 돔박새
돔박새 운다 돔박새 운다
새벽안개 속에 돔박새 운다
어둠을 쓸며 어둠을 쓸며
생명꽃, 환생꽃, 번성꽃 물고,
어둠을 쓸며 돔박새 운다.
돔박새 운다 돔박새 운다
새벽안개 속에 돔박새 운다
제주 절섬
성읍2리 구렁팟
붉은 동백 가지 끝에서
주문을 외며 돔박새 운다
돔박새 운다 돔박새 운다
새벽 안개 속에 돔박새 운다
배고픈 새 쌀 주고
물 그린 새 물 주며,
사랑 잃은 새 님을 그려
밤비 소리 가르며 돔박새 운다.

♧ 질치기
설운 님 오시는 길은
봄밤 새 풀 돋아난 바람길이어라.
비비둥둥 살장고 치며,
혼 씌워 오는 밤에
하올하올 날아서 오는
나비 다리어라.
테우리 마소 모는 소리 유연하고,
질토래비는 자왈곶[荊棘] 헤쳐가는데
어둔 밤 참호의 비명도 이어지는
어욱꽃 뉘엿뉘엿 눈부신 한라산,
님이 오시는 길은
바람길 구름길이어라.
칭원한 소리 안개 속에 흐르는
저승길 대나무 상가지
백지 나부끼는 자왈곶[荊棘] 지나,
저승문 문직대장에 인정 걸고,
저승길 무명천 밟으며 상마을 도올라
아, 님이 오시는 길 열려 맞자.
자손은 조상 그려,
조상은 자손 그려,
비새[悲鳥] 같이 울음 우는 봄밤
님이 오시는 길,
칭원하고 원통한 저승길 열두 구비
열려 맞자.
* 문무병 시집 『엉겅퀴 꽃』 (도서출판 각, 199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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