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길 이야기

추사 유배길 3코스 – 사색의 길(완)

김창집 2022. 10. 27. 00:27

*창고천 일부

창고천 임관주의 마애명

 

  감산리 마을회관에서 창고천 임관주의 마애명을 찾아간다. 일주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창천초등학교 앞 교차로에서 남쪽 냇가로 난 감천로를 따라 들어가면 진입로에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만화로 그린 임관주의 마애명안내판이 서있다. 거기서 냇가로 내려가는 널빤지 계단이 유실되고 하천이 마구 패여 30m 앞이라고는 하나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한 40년 전쯤에 우연히 보고 수첩에 옮겨 적느라 벌에 쏘이기까지 했는데, 그 후 수차례 하천의 범람으로 주위가 완전히 달라져 한참을 헤맸다. 스스로 글을 새겼는지 아주 얇게 파놓은 마애명이라 돌이끼가 끼어 읽기가 어렵다. 내용을 보니, 귀양에서 풀려난 감회와 주변 풍광을 읊었다.

 

  始出荊門日(시출형문일) 先尋枕下川(선심침하천) 蒼巖三曲立(창암삼곡립) 短瀑晩楓邊(단폭만풍변) 丁亥 秋(정해추) 任觀周(임관주)

  ‘비로소 귀양 살던 집을 나서는 날/ 먼저 집 아래 시내를 찾았네./ 푸른 바위는 꾸불꾸불 물굽이를 둘렀고/ 짧은 폭포 가엔 늦은 단풍이 걸렸네.’

 

*희미해져 가는 임관주 마애명

 

  임관주는 영정시대 활동했던 문신으로 1732(영조 8)에 태어나 1756(영조 32)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지평(持平)을 거쳐 1767년에 정언(正言) 벼슬을 할 때 바른말을 많이 하다가 상대의 미움을 사 그해 6월에 대정현 창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70세의 노부(老父)를 모셔야 한다고, 석 달 후인 95일에 특별히 방면되었다.

 

  할 말은 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진 분이라, 다시는 오기 힘든 섬임을 생각해 두루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글을 새겼다. 이곳 말고 한라산 백록담과 용연, 천제연, 산방산 등지에 시 한 수씩 새기고 떠났다. 그야말로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를 그런 식으로 실천한 분이라고나 할까.

 

* 오현단의 '송우암적려유허비'

 

창천의 권진응

 

  권진응(權震應)은 영조 때의 문신으로 과거를 보지 않고 초선(抄選 : 의정대신과 이조당상이 모여 필요한 사람을 가려 뽑음)으로 시강원 자의(諮議 : 7품 벼슬)에 뽑혔는데, ‘유곤록(裕昆錄)’에 대해 상소했다가 이곳 창천에 유배되었다. ‘유곤록1764(영조 40)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정책의 지속적인 추진을 통해 당파와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영조의 의지를 밝힌 글이다.

 

  권진응은 1771(영조 47) 3월 창천에 도착해서 강필발의 집에 들어 적소(謫所)창주정사(滄洲精舍)’라 부르며 주자(朱子)를 본받아 글을 쓰고 지방유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다 이듬해 1월에 60세가 넘었다고 특별사면이 되었는데, 돌아가기 전에 할아버지의 스승이었던 우암 송시열이 머물었던 곳을 돌아보고, 지방유지와 사림들께 건의하여 유허비를 세우도록 유도하였다. 지금도 오현단에 송우암적려유허비가 남아 있다.

 

*추사 서간

 

제주에서의 제자들

 

  창고천 진입로에 낡은 안내판이 서 있는데, ‘창고천 생태공원이라 했고, ‘기다랗게 뻗은 하천 양편으로 기암절벽과 아름다운 상록수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보기만 해도 시원하며 조그만 폭포수를 볼 수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하천은 2011년 국비 1, 도비 1억 도합 2억 원을 투입, 탐방로를 설치하고 습지를 정비했었다. 하지만 이후 10년간 손을 보지 않아 홍수에 유실된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절벽 사이로 낙숫물이 쉼 없이 떨어지는 옆 암반에 앉아 유배 당시 추사의 주변을 생각해본다. 의지할 곳 없는 유배지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몇몇 제자들은 어쩌면 가족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제자들은 말벗도 되어주고 그에게서 예술과 학문을 배우면서 옆에서 일을 도왔을 테니까.

 

  당시 그의 제자가 삼천 명이 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사공박계첨이시형김여추이한우김구오강도순강기석김좌겸홍석우김병욱을 들 수 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제주필원이 되어 학문을 계승시켰다.

그 중 박혜백(朴蕙百)은 곽지 사람으로 호가 계첨(癸詹)인데, 추사로부터 글씨와 인장 새기기, 붓 만들기 등을 배워 제주필원으로 꼽혔다. 그는 추사의 인장 180여 개를 찍고 이름 붙인 완당인보(阮堂印譜)’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고, 상경 길에 따라가 그의 재주를 시샘하는 이들로부터 독살을 당했는데, 애석해 하며 추사가 써준 南國詞人朴季詹(남국사인박계첨)’이라는 신판 글씨가 그의 후손에 전한다.

 

  또 이한우(李漢雨)는 신촌 태생으로 호가 매계(梅溪)인데, 추사를 찾아가 배움을 청해 일가를 이루었다. 소백 김달삼과 이락 이계징, 해운 김희정, 석호 고영흔 등 제주유림을 대표하는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가 꼽은 영주10경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된다.

 

*추사 적소에서 고개만 들면 보이는 산방산과 단산

 

추사의 생애

 

  돌아오는 길에 추사의 생애에 대해 생각해본다. 세상 사람들은 온갖 재주와 학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때를 못 만나 그대로 썩히는가 하면, 그로 인해 오히려 불행한 길을 가기도 한다. 그런 차원에서 조선시대 유배생활로 존숭(尊崇)을 받게 된 두 분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다산(茶山)과 추사(秋史)를 들 것이다.

 

  사색당파로 갈려 바른 소리 하는 사람을 가만 두지 않았던 시기, 날마다 시류에 이끌리다 보면, 조용히 사고(思考)하며 저술하거나 예술에 몰두할 시간을 가지지 못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데, 유배생활로 자연스레 그들과 단절함으로써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으니까.

 

  번잡한 일상을 떠나 제자와 동생이 구해다 주는 책을 마음껏 읽고,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면서, 몰려드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즐거움을 누렸으니, 어쩌면 그의 유배생활은 하늘이 내려준 호기(好機)가 아니었을까. (끝)

 

*추사 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