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옷*
풋감이 흰 광목 입에 물면 햇볕은 점점
노을 빛 닮은 물감으로 붓을 든다
흰 공목 씨줄 날줄에 감물을 잔뜩 먹이고
뜨거운 태양과 눈을 맞추면 시간이 익어갈수록
따뜻함이 묻어나 붉은 노을이 고이고,
어머니, 노을빛 갈옷 입고 초가지붕 엮을
억새 찾아 산으로 간다
무서운 갈매나무 침이 무릎 가까이와도 갈옷은
상처 하나 허락하지 않아,
갈옷으로 억새뿌리에 질긴 고단을 꼭꼭 묶어
수십 년 초가를 엮고 세월을 엮었다
긴 시간 산을 짊어지어 자연을 거칠게 만지던
갈옷은 아직도 어머니 풀죽은 무릎 안아
위로하며 잘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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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옷 : 흰 천에 풋감을 입혀 갑옷처럼 질기게 만든 제주도 사람들의 일복.
♧ 김치
방향 감각이 밤인 내가 낯선 거리에서
상행선과 하행선 구분 없이 삼화단지라고 읽으며
버스를 탄 뒤였다
고산동산을 돌아 산길을 돌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선미마을
겨울 저녁은 설핏 저물어 오고
구간이라고 해도 그리 길지가 않지만
당황한 내가 바라보는 구간은 너무 길다
종점으로 가서 다시 돌아오자 생각하며
내 몸을 의자 속으로 묻으려는 순간
사라봉 안내 멘트에 빠르게 벨을 눌렀다
버스는 보냈지만 주위는 어둡다
낯선 마을에 낯선 얼굴들이 표정 없이 지나간다
불안의 시간 안고 떨고 있을 때
빈차라고 불 켠 택시가 반대 길을 달린다
마치 무인도에서 구조 신호 보내듯
두 손 들어 흔들자 택사가 나를 향해
깜박깜박 응답이 왔다
♧ 저물 무렵
갯바람 활처럼 불어오는 화북 포구
낮은 돌 팡 위에 물총새 한 마리 앉았다
울타리 안에 그늘이 반쯤 들어
빨랫줄에 마르지 못한 할머니 모자,
꽃무늬 양말 두 켤레,
손녀들 함박웃음 끌어 모아
구름 사이로 볕을 부른다
골목 긴 담장 아래 짐 실어온 동네 돌던
리어카 녹이 슨 무릎 안아
헌 장판때기 말린 채 끙끙 신음소리,
선잠 자던 구물 평상, 담 너머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기지개 켠다
넘치던 바닷물이 떠난 자리 용천수,
부지런쟁이 작은 물총새 한 마리
언 발 오무려 바위 틈새 초록 이끼
고소한 맛 잊을 수가 없다
황금수산 간판 큰 글자 위에 갯바람
주렁주렁 매달려 겨울을 마냥 즐긴다
♧ 마당 지킴이들
찬바람 불어
덧창 내리고 문 걸었지
아이 눈높이 밥풀 덕지덕지 붙여 놓은
깨진 작은 유리 조망 존
마당에 백구와
창문에 붙은 유리 조망과
작은아이 눈동자
훈련으로 익혀진 서로의 약속
컹컹 백구의 휘슬
아이를 부르는
유리조망
쪼르르 달려가는 아이
아무도,
초가지붕 눈썹 위에
달개집 흔드는
바람소리
콧물 옷소매로 닦으며
돌아서는 아이
♧ 청라靑蘿
-제주4․3
아버지 이름 김병후
칠십 년 넘도록 입속에 물고 있어 좀처럼 접혀지지 않아
혀끝이 아립니다
초록 초록한 손으로 쳇대기 끌어안아 탕건 물 적시던
스물다섯 살 당시의 부해생 그녀는 아흔아홉 살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손금 안에서 자라야 할 젖 냄새 가시지 않던 딸들도
바늘귀 서슴거리는 시간 앞에 서 있습니다
이장하는 날
총알이 지나간 아버지 두개골에 어머니는 엉킨 풀뿌리 뽑았습니다
아직도 화약 냄새 가시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과
어머니 등 다독이던 아버지 따스한 손가락 스물일곱 뼛조각 이삭 주우며
어머니는 구멍 난 심장에 불을 댕겨 줄 배터리를 찾았습니다
손수 지은 노란 명주옷 박음질 사이로 서럽게 주운 뼈 이삭 모시며
거름망 없는 날 돋은 소리로 바람을 향하여 어머니 소리쳤습니다
“아이들아. 이 해골이 너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청라였습니다
제주 4․3 붉은 바람이 검은 돌담을 쳐부수기 전까지는 한없이 뻗어나갈 청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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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대기 : 탕건을 겯는 연장의 한 가지.
*부해생 : 인명.
* 김정순 시집 『늦은 저녁이면 어때』(메이킹북스, 2022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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