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꾸지뽕나무 – 김순남
여봐란 듯 살고 싶어서가 아니다
온 몸에 두드러기가 꿀렁꿀렁 일어나
물기 없는 이파리 푸석거려가며
샛노란 그리움을 뿌리 가득 칠해야 했다
몸에 좋다 약이 된다.
너도나도 덤벼들기만 했다
하다못해 충 먹은 양 우글락 부글락
못 생긴 열매 하나까지도
남아나지를 못 하겠다
아서라,
선무당 사람 잡는 풍월에
귀 쫑긋 휘 동그래지는 칭원한 사람들아
내 뭔들 못 주랴
굳이면 어떻고 꾸지면 어떠냐
쿡가시낭 이름도 있으니
이 몸 아껴 무엇에 쓰리
어울렁 더울렁 같이 사는 세상
까짓거,
비우면 채워지고 채워지면 넘치는 법
모진 비바람도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버거운 길 위에서 우리
뜨겁고 서러운 시절들을 위해 기도하자
네 몸의 가시가 슬픔의 강물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 소나무 – 김성주
명치, 그 작은 연못에 내리는 빗소리
꽃뱀*
꿈틀꿈틀
구불구불 연못 위를 휘저어
굵어지는 빗방울
꽃창포 봉오리가 봉인된 기억을 터뜨린다
유혈목이 독이 온몸으로 번지는 밤이다
꽃상여
눈꽃 흩뿌리는 산길을
삭풍의 울음소리가 끌고 간 벌판
관 위를 나이테 덮어 만든
움막에 들어
시집와 처음 팔다리 쭉 펴시는
할머니
바람코지 동산 위 소나무
왜, 꽃뱀은 솔 씨 하나 물고 이리 왔는지
왜, 태풍은 이 길로만 지나는지
우지직, 가지 부러지고
또 부러지고
하나 남은 우듬지마저 꺾일세라
쩍쩍 갈라진 손발 버둥거리며
한 송이 붉은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사시사철 부르르 푸르르
푸르름 위로 흔들리는 젖은 하늘
꽃뱀에게 물어뜯긴 적도 없는 것이
괜히
---
*꽃뱀
5色의 5毒을 넣어
버무린 진흙덩이
무엇을 물어뜯지?
밤새 앓는 소리
상사화 핀다
♧ 떨어져 있는 것들 – 김순선
나무들이 가을볕에 앉아
화장을 한다
화장이 짙어질수록
나무는
소소한 바람에도 자꾸
삐지나
햇볕을 가려주던 그 많던
푸른 잎 탈모증으로
하루가 다르게 가지가
휑해지던 날
바람 없는 안방에도
자고 나면
여기저기 안경 너머
떨어져 있는 것들
저물어가는 날의 비애 같은
쓸쓸함
돌아서면 나날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것들
♧ 나의 시 – 김원욱
집 안에 걸린 오래된 액자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첫눈 내리던 날 가야산 자락 어느 분의 다비장, 화염 속으로 뛰어든 눈발에 갇혔다
강산이 세 번 바뀌고 가정도 바뀌는 동안 눈 내리는 액자 속 작은 암자는 변함없이 화염에 휩싸여 있다
잠시 머무는 집을 나와 가만히 암자로 들어서니 잘 닦인 사리 구슬이 거친 눈발을 뚫고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이때 화염에 든 내 시(詩)가 슬금슬금 먹물 속으로 스며들었다 시간의 행간에서 깜빡 한눈파는 사이
총부리 매서운 제주 들판, 이 악물고 떠내려 온 몇 송이 눈*처럼
---
*등단시 ‘첫눈’의 부분.
♧ 새 떼 3 - 김신숙
천변 작은 장터
가시다시귀 들어서며 시작된 그 길에 도착했다
주머니는 새의 배처럼 불룩해 있었다
망월동 지나 광장을 돌아 순례를 하며
피 솟구친 흔적만 훑었다
새 부리가 심장을 콕콕 쪼았다
그래서 새의 부리만 주워 담았다
금방 가득 찼다
황금동 거리에 도착했다
아직도 불이 밝았다
주소지가 분명하지 않은 새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어디로 날아갔을까
그 길은 붉은 등처럼 웅크린 새들을 걸어 놓았다
오래 떠 있기 위해 새들은 먼저
부리를 뗐다 새 장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새 떼가 되었다
새 떼, 지저귀지 않는 새 떼
발바닥이 없는 새들은 발톱으로 섰다
그래서 굽이 높았다 흩어진 항쟁의 힐들처럼
황금동은 여전히 빛났다
새벽이 찾아오면 깃털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소리가 없는 새들은 이상한 형체로 중얼거리다
가물거리다 일렁이다 조명처럼 툭 꺼졌다
갸들* 우리는 갸들의 말을 기록한 적이 없다
---
*1980년 5월 당시 평범한 주부로 항쟁 마지막 날 5.18의 실상을 알리다가 간첩으로 몰려 고초를 당한 이영자 씨의 인터뷰 중 “31사단으로 끌려갔을 때 황금동 유흥가 아가씨들도 한 다섯 명 정도 들어왔었거든. 이름도 못 올린 황금동 갸들도 있잖아.”라고 말했다.
*계간 『제주작가』 2022년 겨울호(통권 79호)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혜향문학' 2022년 하반기호의 시(2) (0) | 2023.01.11 |
---|---|
'제주시조' 2022 제31호의 시조(6) (0) | 2023.01.10 |
월간 '우리詩' 1월호의 시(1) (0) | 2023.01.08 |
계간 '산림문학' 2022년 겨울호의 시(3) (0) | 2023.01.07 |
'한수풀문학' 2022년 제17호의 시(3) (0) | 2023.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