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어보전회 마지막 강좌로 마련된 현장답사를 위해
다시 서영아리 오름에 올랐다. 오름에 있을 만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오름이어서 종합선물세트 같다는 이야기다.
사방이 탁 트인 정상, 그리고 멋있는 바위와 억새,
올 가을 단풍을 못 본 분들에게 맞보기를 보여준 숲,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냈지만 적당한 크기의 호수,
거기다가 가을을 장식하는 물매화, 꽃향유, 자주쓴풀 같은
들꽃들의 향연, 게다가 막걸리를 마시는 여유까지….
오후에는 제주학연구센터 개소기념 세미나
‘제주학의 발전방안 모색을 위한 세미나1’에 참석했다가
지인의 부친 조문을 다녀오고 나서, 친구 부인의 제사에 참가해서
오랜만에 만난 시골 친구들과 고인과의 옛날을 추억하며
소주 한 잔 곁들인 꽤 바빴던 하루였다.
쑥부쟁이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30~100cm이며,
잎은 어긋나고 피침 모양이다. 7~10월에 옅은 자주색 꽃이
총상(總狀) 꽃차례로 피고 열매는 작은 수과(瘦果)를 맺으며
어린잎은 식용한다. 동아시아에 분포한다.
♧ 쑥부쟁이의 노래 - 서지월
우리가 먼 길 가는 바람 앞에서
늘 배웅하는 자세로 흔들린다면
흐르는 시냇물도 제 갈 길 따라 가겠지만
가서는 오지 않는 이름들이 가슴에 남아
밤이면 무수한 별들의 재잘거림으로 높이 떠서
이마 위에서 빛날 일 아니겠는가
심지어 때아닌 먹구름장 겹겹이 몰려와
천둥과 번개를 일으켜 위협할 때도
땅에 뿌리박고 사는 죄 하나로
흠뻑 비맞고 놀라 번뇌의 세상 굳굳하게 견뎌낸다지만
표석처럼 지키고 선 이 땅의 이름은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
생각해 보면
먼 길 재촉하는 구름이나 수레바퀴 굴러가는 소리
귓전에 사무쳐 오지만
스스로의 무덤을 만들며 스스로의 잠언을 풀어내는
몸짓 하나로 남아서
모두가 떠나도 떠나지 않고
푸른 손 휘저으며 여기 섰노라
♧ 쑥부쟁이 - 김종제
보라색 저고리 입고
양지바른 언덕에 앉아
철도 모르고, 때도 모르고
하염없이 누구를 기다리나
얼마나 오래 묵었는지
바위 아래 가만가만 뿌리를 내리고
향기도 빛깔도
속으로 울음처럼 삼키더니
찬바람 불어도 돌아서지를 않네
잠시 살 섞고 떠나간 사람
못 잊고 기다리는 것일까
잠깐 뼈 같은 마음 주고 가버린 사람
다시 온다고 굳게 믿었을까
낯선 이 같은
한 겨울 햇살이 다가오자
얼굴 붉히는 저 꽃이 애처로운데
한 번 떠나간 시절 잊어라 하고
한 번 떠나간 세월 돌아보지 말아라
하지만 미련이 잔뜩 남아서
흐르는 눈물이 얼지도 않고
냇물로 잘도 떠내려가고 있네
쑥부쟁이야, 쑥부쟁이야
마음도 사랑도 이제 내려놓고
강 건너 가야지
멀어서 하루에 닿지도 못하는
집을 찾아 어서 돌아가야지
♧ 쑥부쟁이 - 구재기
--둑길行·43
둑길에는
오랜 세월을 두고
가난한 쑥부쟁이 여전히 돋아난다
빈손을 자랑스레
하늘 높이 치켜올린다
마음을 비우려는 자는
모두 다 산으로 우르르 몰려가는데
어디에서고 가난에 찌든 자는
산봉우리에 가리워진 그늘인 채로
쑥부쟁이 되어
빈손을 홀로 흔들어댄다
진실보다도 넉넉하게
바람의 무게를 견디어 내며
두 눈을 바로 뜨고
빈손을 좀처럼 거둘 줄 모른다
어둠이
짙어오면 쑥부쟁이
빈손을 모으고 둑길에 눕는다
한 천 년쯤 뒤에야
다시 태어날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둑길에 잠든다
♧ 쑥부쟁이 나들이하는 날에 - 김소해
오밀조밀 늘어뜨린 다리가 엉키지 않도록
흙을 품어 안은 달래는 봄을 간지럽히고
엉금엉금 산등성이를 기어오르던 바람이
산자락을 휘어잡고
아침의 환희를 일으키고 있다
젊은 사람이 떠나고 난 마을마다
옥수수염 같은 흰머리결이 버석대는
노인들의 영원한 실버타운이
흙빛처럼 말이 없다
안개 덮인 밤이 깨어나면
개골창 너머 먼산 바라보던 버들강아지들이
메마른 가지 위에 걸터앉아
먼지 바람 털어 내며 까치를 부른다
감나무를 휘감은 마른 담쟁이넝쿨
이슬에 찬 밤을 잉태하며
봄비에 갇힌 태양을 부른다
오래 전에 천사 같은 연기 뿜어대던
요염한 굴뚝마다 잡초들로 무성하니
비둘기 한 쌍이 나아들어
전원의 아침을 노래함녀
이슬 젖은 꽃비늘을 털고 있다
♧ 쑥부쟁이에 울다 - 김은숙
1. 전설
쑥을 캐러 다니는 불쟁이*의 딸은
거친 가난의 옷 무겁게 입은 쑥부쟁이는
상처 입은 생명 거두어주던 대장장이 큰딸은
칡덩굴 생명줄로 내려보내 기어이
먼 데 사내를 연모하는 거센 밧줄에 묶였네
기다림의 덫에도 부풀던 쑥부쟁이는
속 깊이 노란 꽃술을 가진 연보랏빛 여인
살아서는 한 번 피어보지 못한
가없는 기다림 기다림의 여인
연보랏빛 꽃물일랑 속살 깊숙이 눌러두고
벼랑 아래 몸 던져도 끝나지 않는
그리움만 흐느낌만 무성하게 자랐네
노란 꽃술 입에 문 연보랏빛 여인
쑥부쟁이는 쑥부쟁이는
2. 세월 건너
소슬바람 한줄기 뿜어내며 서있는 그대 곁에 눕네
내 마른 등짝 닿은 지층이 순간 흔들린 듯도 한데
그대 노란 꽃술 언뜻 다가와
서걱대는 내 속을 기웃거리다가
서늘히 내 살 문지르며 한 슬픔을 떨구네
단단하게 뿌리내린 보랏빛 연모 온 몸으로 길러내며
긴 세월을 품고 또 푸는 그대여
나는 잠시 아리고 난감해지는데
내 육신의 그늘에 갇힌 숨은 돌기는
실핏줄 터뜨리며 돌연 일어나
제 녹슨 속살 저미며 또 만발하는데
기다림조차 품지 못한 살갗 밑엔 뿌옇게
저 먼 사막의 모래바람만 흩어진다고
----------------------
* 불쟁이 : 대장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