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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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문학' 2023호의 시(4)

♧ 풀피리 – 송현숙 라일락 잎새 하나 뜯어 곡조를 실어 네게로 띄운다 어린 날 풀피리를 잘 불던 너 풀피리 연주 시작하면 하나둘 네 곁으로 모여들던 어여쁜 친구들 지금쯤 산 너머 피어오른 저 구름을 보고 있을까 ♧ 눈 내리는 밤 – 윤봉택 별들이 지상으로 숨비질*한다. 그때가 언제였을까 금이 간 바위틈 새이로 더러는 낙엽이 되지 못하여 동해 입은 낭섭* 우로 또는 덧난 옹이로 스미며 침향으로 날리는 그렇게 나려 쌓이는 별빛은 물욕의 어둠을 씻고 수만의 아지마다 흰 깁을 내려놓는다 --- *숨비질 : ᄌᆞᆷ네가 바다에서 작업하는 행위 *낭섭 – 나뭇잎이 제주어 ♧ 살얼음 – 윤성조 들숨 잠시 멈춘 새벽 고요 시퍼런 날 위 첫발 딛는 애기 무당 처럼 ♧ 노루귀 – 이옥자 이른 봄 산지를 찾아 그리움을 피운..

문학의 향기 2023.09.08 2

이정은 시집 '평범한 세계'의 시(2)

♧ 그리하여 사라진다면, 침묵이 일어서서 바람을 맞이하듯이 거친 갯벌 밭에서 진흙 묻은 운동화를 벗는다 맨발바닥으로 걷는 흐느낌은 아우성이 아닌 것을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질퍽함은 여기서 마지막인 것을 떠내려가는 운동화를 잡지 않는 검붉은 손 그 손으로 참을 수 없는 노을을 보내주며 일렁이는 것은 조각하지 않는 거짓말 바다 아닌 바다의 물거품 그리하여 사라진다면, 젖지 않도록 숨어 있는 것처럼 귀 막은 소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 공간 문을 열고 들어오셨나요 구두를 벗어요 기다란 소파로 올라와요 꼼지락거려도 되겠지요 다리를 주욱 펴요 소파는 크림색인데요 발가락은 무슨 색일까요? 보이지 않은 색일지도 몰라요 보이는 것이 실재하는 건 아닐 거에요 슬픔이 무엇인지 모르거든요 사람들은 내가 슬픔에서 나오..

문학의 향기 2023.09.07 0

배진성 시집 '서천꽃밭 달문moon'에서(5)

♧ 산과 바다 산은 바다의 지붕 위에 떠 있고 바다는 산에서 내려온 물들의 집 수직은 수평 위에 설 수 있고 수평은 쓰러진 수직의 잔잔한 잠 산의 고향은 바다 바다의 고향은 산 하늘이 수직으로 떨어져 단애 아래를 수평으로 걷는다 산은 바닥에서 다시 출발하고 바다는 다시 하늘에서 내려온다 정방폭포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목숨들 바다에서 다시 날아오르지 못하는 날개들 바닥이 너무 깊이 젖어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수평선 ♧ 연 오래도록 연꽃을 바라보니 나는 연꽃이 되었다 오래도록 나무를 바라보니 연꽃은 목련꽃이 되었다 오래도록 산을 바라보니 목련은 산목련이 되었다 산목련 아래 따뜻한 나무의자 하나 있다 하늘이 내려와 앉을 때마다 함박웃음소리 남몰래 피어난다 ♧ 이리 붙어라 내가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

문학의 향기 2023.09.06 2

양동림 시집 '여시아문'의 시(5)

♧ 아생후살타(我生後殺他) -경선 적을 공격할 때는 우선 나를 튼튼히 해야 하거늘 대표 선수 뽑는다고 힘겨루기 하다가 우리끼리 물어뜯어 상처만 남은 몸으로 어찌 적을 상대해 싸우겠느냐? ♧ 사활(死活) 방이 두 개는 있어야 돼! 나만 들어올 수 있는 비밀의 방이 있어야 발 펴고 잘 수 있는 거야 방이 있다고 하여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운동부족으로 오래 못 사는 거야 방이 있으되 밖으로 나가 일하고 넓은 세계로 가서 새로운 땅을 개척해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거야 살고 죽는 것이 다반사인 세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딱딱하지 아니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생각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저 발 가는 대로 지내다 보니 인생의 막다른 골목이라고 하면 슬프지 아니한가? ♧ 기원 바둑을 ..

문학의 향기 2023.09.05 0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1)

♧ 시인의 말 아픈 숨소리가 차가운 바닥을 흐른다. 이불을 덮었다. 눅눅한 이불 위로 눈이 쌓인다. 숨소리가 눈을 녹였다. ♧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 어두운 추억들은 검은 석탄들처럼 힘없이 부서져 내리네 광부의 심장 속에서 뿜어져 나온 따뜻한 피가 단단한 암석 틈에서 흘러나오네 땅속에 숨어 있던 죽은 바람들이 광부의 뜨거운 목을 서늘하게 했네 석탄 가루가 날리면 광부들은 코를 손으로 막고 킁킁거리고 자꾸 눈을 깜박거리고 가볍게 날리는 것은 모두 아픈 것 이었네 광부의 시커먼 눈 속에서 잎사귀 가득한 나무들이 자라났네 강물의 냄새를 가진 꽃들이 피어났고 그 어두운 공간은 거대한 숲으로 변했지 광부들은 그 서늘한 그늘 속에서 모든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기도 했네 ..

문학의 향기 2023.09.04 4

인기글

4.3 시선집 '거기, 꽃 피었습니까'의 시(2)

♧ 어떤 꽃잎 - 김영숙 의귀리 현의 합장묘 몸살 앓는 꽃 있대요 치레한 돌담 아래 젖가슴 탱탱한 꽃 만삭의 봄까치꽃이 유선乳腺 또 푸르러요 총 맞은 그 아주머니 해산달이었대요 아, 당겨진 배 위로 별이 졌을 거예요 두 아들 꼭 쥔 손이 기도로 뜨거웠겠지요 금어禁語의 시간 지나 자꾸만 돋는 혀 ‘무사 죽였댄 헙디과 무사 죽였댄 헙디과’ 출근길 나를 붙잡고 파랗게 떠는 꽃잎 ♧ 무드내*의 봄 - 김연미 숨죽인 밥 냄새가 잿더미에 흘러요 타다 남은 희망을 삼켜도 될까요 이제 곧 넘을 수 있겠죠 창백한 무드내 겨울 총소리 사선마다 발자국이 쓰러져요 햇살의 살 끝에도 핏물이 번지네요 사는 건 어느 쪽인가요 뿌리가 흔들려요 흑백의 시간에도 공포는 붉어요 벙그물 궤**를 지나 겨우 돌아온 봄 홑겹의 붉은 꽃들을 피..

문학의 향기 2022.04.05 0

제주 '4․3 추념 시집'의 시(1)

♧ 관탈섬을 보며 - 강덕환 모든 인연 접고 우선 저 무인의 섬으로 가자 ‘순지오름 꽃놀이’ * 뒤로 하고 곽개창파 일렁이는 저 해협에서 삭탈削奪의 통한 잠시 숨 골라 잠재우고 다시 돌아올 기약이야 없다마는 떠나야 하리, 등 떠미는 이산離散의 길에 눈에 밟히는 한라산, 도두봉 그리고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 “내 눈이 닿는 곳에서는 죽지 마라” 반세기 만에 찾아와서 본 저 돌섬, 그대로인데 시인**의 눈엔 이슬인 듯 눈물이 맺힌다 회한과 그리움만이 아니다 아직도 이념의 갓冠 벗지 못해 흥정하는 이전泥田 탓이다 --- *시인 김시종이 증언하는 4․3봉기의 신호탄을 알리는 암호문 **김시종 시인 ♧ 관덕정더렌 댕기지 말라 해가 바뀔 때마다 토정비결 책력을 보시는 아버지 자식들 가운데 유독 장남인 내게 하시는 말..

문학의 향기 2022.04.0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