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최명길의 시와 풍경

김창집 2011. 11. 21. 00:15

 

우리詩 11월호는 최명길 시인을 ‘집중 조명’했다.

최명길 시인은 1940년 강릉시 입암동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7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시단에 등단한 후

시집으로 ‘화접사(월간문학사, 1978)’

‘풀피리 하나만으로(스크린교재사, 1984)’

‘반만 울리는 피리(동학사, 1991)’

‘은자, 물을 건너다(동학사, 1995)’

‘콧구멍 없는 소(시학, 2006)’

명상시집 ‘바람 속의 작은 집(나남, 1987)’을 냈으며,

현재 ‘물소리시낭송회’ 상임시인,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강원도문화상 문학부문 수상,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11월 초 강원도 정선, 오대산,

영월을 돌아봤는데,

차창 너머로 찍은 사진과 함께

시 몇 편을 골라 올린다.

 

 

♧ 초연히 홀로

 

설악산 구름밭에 올라앉은

용아장성 바위처럼 초연하게 홀로

볼 수 있는 것 조금 남겨둔 채

들을 수 있는 것 조금 버려둔 채

그저 초연히 홀로

 

이름 크게 안 알려졌지만

냄새 맡을 수 있는 것 조금 남겨둔 채

밧볼 수 있는 것 조금

할 일도 조금은 남겨둔 채

초연히 홀로

 

밤하늘 별들 중 너무 반짝이는 것 말고

너무 흐린 것도 말고

황소자리 한 쪽 구석에서

눈에 뜨는 듯 마는 듯 잠깐

그렇게 초연히 홀로

 

속상한 것 모두 드러내지는 말고

잠시 눈 흘기는 것만으로

기분 나빠하지는 말게

낮게 그저 시의 말도

모두 다 뱉어내지는 말고

 

 

♧ 밭두렁 찻잔

 

그림자가 다가왔다.

밭두렁에 찻잔이 놓이고

그림자가 돌아갔다.

 

잣 물무늬 뜬 찻물 안에는 달마봉이 꺼내든 하늘

 

찻잔을 들어 기울이자

가을을 막 끝낸 황철봉이 새촘거리며

울산암 벼락 바위 뒤로

잠깐 살짝 기웃했다.

 

어스름 포개다 말고 산능선이

노을 다락에서 자벌레처럼 기어 내려와

찻잔 작설물에 곤두섰다.

 

그 사이 나한봉이 뿔달을 업어와 빠뜨렸다.

나는 찻잔을 도로 놓고

 

짓거리에 그냥 휩쓸렸다.

설산 앞 가슴팍으로

 

 

♧ 동해와 물 한 방울

 

어찌 헤아릴까?

해돋을 녘 동해에 떨어진 물 한 방울

반짝 하는 순간

온 설악이 환히 비쳐 있네

나 이제 그 물방울산 수월(水月)과 함께 해도

괜찮으리

고요해져

한 마리 나비로 변하거나

벌레로 변하거나

 

 

♧ 하늘 장례

 

내가 죽으면 나 없는 나를

하늘에 사는 새들에게나 나누어주어라

제일 배고픈 새들에게

 

고해의 나날들을 끌고 다닌 육신이라

어디 단맛이야 있을까마는

저들이 달라하면 그렇게 하라

 

마음이 살다간 빈 집을 누가 알아

새들이 배불리 먹고 날개 힘 솟구쳐

밤하늘 별밭까지 날아갈지

 

 

♧ 잎사귀 오도송

 

드문드문 구멍 난 잎사귀

벌레가 한 평생 얻어먹고 남은 양식

그 입 자리 참 까치렀다.

 

휑뎅그렁한 구멍으로는

금풍동자가 놋좆에 노를 꿰어놓고

빈 배를 젓고 있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똑딱거리는 잎사귀배

 

암만 가도 제자리 뜨기지만

깊은 산 산그림자가 종일 타고 논다.

 

껍데기는 등이 찢어지고 말라

당체가 사라지고 없다.

 

 

♧ 굼벵이의 무금선원

 

보들보들한 흙가슴 바로 아래였다.

새파란 쟁깃날이 더 이상 내려가 닿지 못할 곳

딱딱하나 싱싱한 황토 바닥을

스쳐 그만 틈을 내고 말았다.

 

봉긋하게 남새두럭을 일구던 중이었다.

 

뭔가 반짝해 쟁기를 내던지고 얼른 들여다보았다.

말갛고 하얀 게 꼼지락 했다.

 

깜깜한 지층 3호 황토굴택 단칸방

사방팔방을 걸어 잠그고

해와 달을 걸어 잠그고 입과 밑을 봉한 채

장자가 용맹정진이라도 하던 것일까

 

한철 걸림 없는 삶이란

실로 저런 고요 후에 온다는 듯

한번 꼼지락했을 뿐 더는 다른 동요가 없다,

하지만 그를 보는 나는 송연했다.

 

벽암 부러지는 소리라도 들렸던가

 

 

♧ 얼음 경상

 

새봄 천화대 천길 벼랑 바위틈에

경상 한 틀 놓였다.

눈발로 짓이겨진 얼음 경상

 

상 위에는 단풍 잎사귀 하나가

경전인 듯 반듯이 펼쳐져 있다.

 

너무 많이 누가 들쳐보았다는 건가

낡아 뒤가 휘황하다.

샛별이 앉아 읽어 본 듯

주위가 별자리처럼 파여 들어갔다.

 

방금 물까마귀도 읽다 만 듯

발자국에 온기가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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