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자연과 시 ‘우리詩’ 12월호가 나왔다. 이번 달은 제1회 인산문학상에 이영춘 시인을 뽑고 특집을 꾸몄다. 권두시론은 서범석 ‘형식이 빚어내는 심미성’, 특별연재는 지난달에 이어 하종오의 ‘모든 살아가는 것들의 향토사(6)’, 기획연재(8) ‘시로 쓰는 사계(四季)’는 정호의 ‘천수만의 겨울과 철새떼’, 영미시 산책으로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를 백정국 교수가 소개했다.
이달의 <우리詩> 신작시 30인 선은 김석규 이혜선 양승준 이보숙 이진숙 노현숙 고미경 윤석주 황원교 임성규 정문석 권혁수 조성림 박은우 이경숙 이현엽 최서진 김영완 장성호 이광 한인철 임채성 김필영 정시마 전흥규 최해돈 한문수 김명림 남호순 전장석 시인의 작품을, 신작 소시집은 김경성, 이환의 시와 해설을 실었다.
제주의 동백은 날씨 탓으로 겨울에 접어들면서 피기 시작하여 이듬해 봄까지 피었다 지기를 계속한다. 지금은 여러 가지 종자가 외지에서 들어와 나름대로 현란함을 자랑하고 있지만, 재래종 동백은 붉게 피었다가 이틀이 지나면 ‘툭’하고 떨어져 썩어가는 동안에도 나무 아래를 장식한다. 오늘 배달된 우리詩 12월호에서 우선 내 맘대로 시 8편을 골라 동백꽃과 함께 내보낸다.
♧ 시간의 저쪽 뒷문 - 이영춘
어머니 요양원에 맡기고 돌아오던 날
천 길 돌덩이가 가슴을 누른다
“내가 왜 자식이 없냐! 집이 없냐!” 절규 같은
그 목소리
돌아서는 발길에 칭칭 감겨 돌덩이가 되는데
한 때 푸르르던 날 실타래처럼 풀려
아득한 시간 저 쪽 어머니 시간 속으로
내 살처럼 키운 아이들이 나를 밀어 넣는다면
아, 아득한 절망 그 절벽……
나는 꺽꺽 목 꺾인 짐승으로 운다
아, 어찌 해야 하나
은빛 바람결들이 은빛 물고기들을 싣고 와
한 트럭 부려놓고 가는 저 언덕배기 집
생의 유폐된 시간의 목숨들을
어머니의 시간 저쪽 뒷문이 자꾸
관절 꺾인 무릎으로 나를 끌어당기는데
♧ 송년제 - 김석규
올해도 흑싸리 쭉지였다고 구시렁구시렁 섣달이 저문다.
한 푼 두 푼 뼈 빠지게 모은 돈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 버리고
흙탕물 넘칠 때마다 부지런히 개헤엄으로 헤쳐 왔건만
속절없는 애통터지는 일들에 허망하게도 파투나 버리고
허구한 날 허발치고 투덜거려봤자 입만 아픈 섣달이다.
♧ 섣달 - 김석규
이지러진 창백한 하현달
눈 위에 기러기 발자국
♧ 난전에 앉아있는 가을 - 고미경
온양 장날, 구불거리는 길들 흘러들어와 오종종한 살림을 벌여놓은 좌판들 사이 몇 푼 손에 쥐려고 진종일 쭈그리고 앉은 할머니 곁에서 서러운 가을 표정도 잃어버리고 함께 난전에 나앉아 오천 원짜리 다발로 오롯이 목을 놓고 있는 구절초. 눈망울이 어룽어룽 몸은 오일장에 있어도 신발에 묻어온 흙처럼 마음은 산자락 가을빛에 머리감는 개울물. 푼돈도 쥐지 못한 할머니 따라 막 버스 타고 돌아가면 발끝에 어둠이 툭, 툭, 돌멩이 차이는 길 달빛만 흔들리겠네.
♧ 죽산리 가을 - 윤석주
- 山中日記 14
寒露한로 지나 霜降상강 며칠 앞둔 요즈음, 가을비 한둘금 지나간 뒤 설핏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스칩니다. 하늘재 오르는 양 길옆으로 탐스런 사과가 낮술에 취한 기녀마냥 얼굴을 붉히며 오가는 사람을 맞습니다. 태풍 가뭄 견디며 자식처럼 키워온 사과를 수확하는 검붉은 촌부의 팔뚝에 힘줄이 싱그럽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초록물결을 뽐내던 가을산에 개옻나무가 제일 먼저 낯빛 붉힙니다. 얼마 있으면 온 천지가 붉게 타오를 텐데 청정 소나무는 그대로입니다. 해종일 젖은 눈빛으로 나무만 바라보다 길을 숨긴 숲의 숨소리 따라 쉬엄쉬엄 걸으며 목메게 그리운 것도 잠시 잊으렵니다.
♧ 새벽, 강을 건너다 - 임성규
물속 깊이 야윈 발을 담그는 갈대들
목을 흔들어 강물의 속삭임을 들려줄 때
끊길 듯 희미한 울음이
내 안에서 들렸다
맨발로 가난을 건너가던 어머니
낮은 치맛자락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누군가 강을 건너와
내 손을 잡는다
♧ 사람멀미의 향토사 - 하종오
들꽃 구경 온 외지인들이 들을 지나간 뒤
삽 들고 나온 부락민들은 무너진 논둑 다지고
바람 구경 온 외지인들이 모롱이 돌아간 뒤
길가에 앉아 바라본 부락민들은 한숨 쉬고
녹음 구경 온 외지인들이 그늘에 쉬었다 간 뒤
흙 묻은 손 털며 부락민들이 땀 말리고
단풍 구경 온 외지인들이 탄성 지르고 간 뒤
밭두둑 짓밟힌 부락민들은 얼굴 붉으락푸르락하고
땅 사러 온 젊은 외지인들이 돌아보고 그냥 간 뒤
농사 못 짓는 늙은 부락민들은 빚 걱정하고
♧ 겨울 시편 - 김경성
한겨울 날아드는 철새 떼는
전깃줄부터 팽팽하게 맞춘다
봄부터 가을가지 마음 열고 있는 전깃줄을
오동나무 공명판에 걸어놓고
바람의 연주를 한다
산조가야금 소리 들판을 가로질러 갈 때
저수지의 물결마저 일시 정지하여
제 몸 위에 얼음판을 올려놓고
새들의 그림자까지 다 받아낸다
춤을 추는 산사나무,
붉은 열매 후드둑 떨어트려서 음표를 그려대고
저수지 큰북을 두드리는 새떼가
한꺼번에 날아오른다
대숲에서는 마라카스* 소리가 비바체로 흘러나온다
---
* 통속의 재료를 흔들어서 음을 내는 악기
♧ 기러기 - 메리 올리버(백정국 역)
착하지 않아도 돼.
기어서 사백 리 사막을
참회하며 건너지 않아도 돼.
네 몸 속 부드러운 동물이 사랑하는 걸
사랑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면 돼.
절망을 말해봐, 너의 절망을, 그럼 나의 절망도 말해줄게.
그새 세상은 흘러가겠지.
그새 태양과 비에 씻긴 깨끗한 조약돌들은
움직이겠지, 풍경을 가로질러
초원과 깊은 수풀
산과 강 너머로.
그새 기러기들은 저 높이 청량한 파란 공길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겠지.
네가 누구든, 얼마나 고독하든
세상은 네 상상력에 자기를 맡기고
너를 소리쳐 불러, 기러기처럼 거칠고 들뜬 목청으로?
세상만물 가운데 너의 자리를
거듭거듭 알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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