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황동규님의 시와 늦단풍

김창집 2011. 12. 20. 08:59

 

하루 종일 김일성 북 국방위원장의 사망소식으로

이어지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와 무심코 걷다보니

동네집 울타리 안에 아직도 단풍이 떨어지지 않고

소탈한 빛을 띠고 있다.

 

북풍을 피한 양지쪽이어서 제 색은 띠지 못했으나

그런대로 소탈한 모습이 꼭 나이 든 할머니들이

늦깎이 학생이 되어 글을 배우느라 괴발개발 써 놓은

글씨처럼 정이 가면서 짠해진다.

 

  

 

♧ 죽음의 골을 찾아서* - 황동규

     ―- C에게

 

1

 

갈 때는 결국 모두 버리고 떠나는 거지?

태평양 물금 아래로 해가 떨어지는 것을 정신 없이 바라볼 때

수첩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

운전면허증

비자 카드

뱅크 오브 아메리카 카드

소셜 시큐리티 카드

도서관 카드

증명사진 몇 장까지.

동네 바에 내려가 조용히 맥주 한잔 마시고 돌아와

고흐의 빨간 담요 노랑 시트

따스한 침실 그림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동물들처럼 웃고 있는 그의 의자들을 보며

같이 웃을 준비를 하며

늘 하듯이

한가운데 금(金)색 띠 두른 잔에

스카치를 띠까지 따르고

오늘은 조금 더 따라 한번 출렁이게 하고

물을 약간 섞는다.

밤 열한시, 지금쯤엔 높은 곳으로 가곤 했는데

오늘은 엘리베이터 잘못 탄 듯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해면(海面)보다 낮은 곳을 사람들은 왜 죽음이라 불렀을까?

왜 죽음의 바다, 죽음의 골이라 불렀을까.

죽음이란 과연 낮은 곳일까.

죽음보다 더 낮은 곳은?

 

태평양에서 해가 지고 있다.

새들이 황망히 나는 바다 저편에

하늘 위에 있을 때보담 더 정열적으로 붉어진 불덩이가

마지막으로 지상을 한번 더 엿보려는 듯 턱 치켜들고

해면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배 두 척이 바삐 헤엄치고

하늘과 함께 붉은빛으로 물든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날던 새들이 사라지고

해면 아래로 해가 떨어진다.

잔이 부엌 바닥에 떨어진다.

목마름!

 

  

 

2

 

평생 지평선 수평선을 그린 러시아 출생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는**

그림 팔리기 시작하자 목매어 자살하고

나는 그의 지평선 하나를 얻기 위해 버클리를 헤맸다.

지평선, 신과 인간이 만나던 금,

다가가면 늘 뒷걸음치던 금,

때로 인간의 마음속에 간신히

그것만 보이던 금,

그 금이 완성돼

인간의 목을 맬 올가미가 만들어진다면?

아 인간의 발이 바닥에 채 닿지 않는 외로움!

전철 속이 너무 환해 그만

애써 구한 복사화를 놓고 내린다.

 

  

 

3

 

‘죽음의 골’ 꿈을 꾼다.

아무리 걸어도 지평선이 나타나지 않는다.

모래 위에 엄청 큰 선인장들을 지나친다.

한 그루, 한 그루, 또 한 그루, 그리고 또.

완전히 닮은 선인장들의 계속적인 출현.

자세히 보면

내 발이 허공에서 버둥대고,

화다닥 놀라 잠을 깬다.

 

  

 

4

 

신새벽에 LA를 떠난다.

카세트로 듣는 버디 가이의 걱정스런 “다음엔 어디서 터지지?”***

이 세상에 터질 일 좀 많으랴.

이 청명한 날씨

혹시 사막 속의 차 고장?

내리쬐는 햇빛 속에 무작정 기다리는 인간의 그림자.

가만, 아파트 화분에 물 주고 오는 것을 잊었구나.

조그만 화분 하나는 이미 시들고 있었지.

아직 터진 것은 아니다, 화분 속에 산 것들이여, 며칠만

며칠만 목에 침 삼키며 참아다오.

길 양편엔

하나하나 다른 옷 입은 허수아비 같은 조수아 나무들이

팔에 팔이 달린 팔들을 벌리고 서 있다.

기름 넣기 위해 들른 코소 정션

인구 9명,

해발표고 1120미터.

노란 늦단풍 막 들고 있는 올란차에서 190번 도로를 타기 전

5000미터 가까운 만년설 휘트니 산의 훤한 이마가 왼편에서 나타나

계속 뒤따라온다.

 

  

 

5

 

도로가 해발 0미터 아래로 낮아지고

바람도 들어와선 길을 잃는다.

선인장은 없고

큰 공 모양의 사막 납가새 드문드문 꽂혀 있는 땅 위로****

서로 모습 다른 모래 둔덕들이

그냥 서 있지 않고 계속 흐르고

겉으로 보면 흐르지 않아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흐름이 보이고

죽음이 느껴지지 않는다.

까마귀 몇 마리 낮게 날고 있는 저 하늘 아래

언젠가 계속 옮아 다니며 모습을 바꿀 수 있게 된다면!

바람도 들어와선 길을 잃는다.

 

  

 

6

 

헐떡이는 차를 몰아

죽음의 골이 발 아래 내려다보이는

‘단테의 시야(視野)’에 오른다

정상 1700미터.

내 몸이 선 곳과

건너편 흰 눈을 쓴

3000미터 파나민트 연봉(連峰) 사이에

해저 95미터의 드넓은 소금 골이 펼쳐져 햇빛을 받고 있다.

저 빛, 어떤 물감도 거부하는

무명(無明)의 빛!

단테가 이 자리에 온다면

저 밑 저 찬란한 소금 골을 지옥으로 만들까?

저 차고 단단한 빛을?

차라리 뭣이 터질까 두려워하는 인간들이 매달린

이 정상을 지옥으로?

 

  

 

7

 

아 인간의 발이 바닥에 채 닿지 않는 외로움

그 외로움을 찾아 선인장도 없는 사막을 뚫고 달려왔다.

해발표고 마이너스 95미터를 하염없이 걸어도

빛나는 소금 골을 눈이 찡하도록 걸어도

죽음의 골은 계속 내 발을 받아주었다.

죽음은 두 발을 허공에 내어준 외로움도

산 자의 것으로 되돌려준다.

 

죽음에도 능선이 있고

능선에 뜨는 달이 있다.

자브리스키 포인트에 오른다.

달빛 속에 색감 조금씩 바꾸는

노랑 둔덕, 검정 둔덕, 파랑 둔덕 들이 황홀히 서 있을 뿐

어디를 보아도 버려진 시간은 없다.

언덕 너머 소금 빛이 피어오르고

달빛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달이 좀더 높이 오른다.

여러 색 둔덕들이 제각기 살아나 숨을 쉰다.

죽음의 골 전체가 숨을 쉬고

별들이 쟁그랑거리며 소근댄다.

저 언덕 어디엔가는

각기 제 삶을 안고 잠든 짐승들

새들이 있을 것이다.

전에 없이

잠투정하는 놈도 있을 것이다.

아끼는 잔이 또 하나 쟁그랑 깨질 것이다.

 

 

-----------

* Death Valley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동남 네바다 주 접경에 있는 계곡으로 주로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해발표고 마이너스의 소금밭과 모래 둔덕으로 되어 있다. 사막 속에 있는 계곡답게 기온의 차가 심하고 건조해 드문드문 눈에 띄는 마른 식물과 눈에 잘 띄지 않는 몇몇 동물들을 빼고는 죽음의 장소이다.

** Mark Rothko(1903∼1970) : 뉴욕에서 활동한 추상표현주의 화가

*** 흑인 블루스 가수 Buddy Guy가 노래한 〈Where The Next one Is Coming From?〉

**** Creosote bush :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사막에 사는, 가시가 있는 납가새과 식물

 

 

 

'디카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탄 전날이 왔는데  (0) 2011.12.24
사철나무 열매에 사랑이  (0) 2011.12.21
나뭇가지에 핀 눈꽃  (0) 2011.12.15
김순이 시 '제주수선화'  (0) 2011.12.14
나무야 겨울나무야  (0) 2011.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