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을 걷는 즐거움이 어찌 한 가지랴?
그것이 눈이 내리는 순간이라면
펄펄 날리는 눈발을 보며 주변 경관을 즐기든가
촘촘한 나뭇가지에 내려 앉아 여러 가지 모양을 한
동물 모양의 소품들과 가끔 나타나는 양떼의 실루엣을 즐기고.
잎을 털어버린 가는 나뭇가지를 얇게 감싸 하얗게 빛날 때도 있고
연속해서 눈을 붙여 두껍게 나뭇가지를 감싸고 있는 이 같은 풍경들.
그것이 얼어버리면 상고대라 하여 수정 같은 모습을 보이는데
사그락사그락 부는 바람에 서로 비비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사라오름에 오르는 길, 이렇게 두꺼운 눈이 나의 발길을 붙잡았다.
♧ 겨울나무 - 김승동
혼자서 쳐다보는 하늘이 왜 그리 시린지
소매 끝에 바람 한 점 묻지 않아도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눈가에 마른 물기가 반짝이는지
어둠이 하얗게 바랜 아침
찢어진 편지지를 날리듯 흩어지는 눈발아래
왜 그렇게 울음이 나오는지
땅 속 깊이 다리를 묻고 서있어도
어찌하여 온 몸이 비틀거리는지
밤을 지샌 귀앓이에 세상 인연을 끊고
아픔을 삭여 가지 끝에 보내 보지만
어찌 속껍질마저
차가운 불면에 빠져드는지
우두커니 서서
목젖이 아프도록 바람을 삼키다가
삭정이를 쪼아대던 딱새 마저 떠나간 날
서럽도록 적막한 이 낯선 사실이
부디 사실이 아니었음을
♧ 겨울나무는 - 임영준
겨울나무는
이유 있는 서러움이 걸려
허청거릴 수밖에 없어
한 해를 꼬박 다 바쳐
잉태했던 핏줄들이
허망하게 떨어져나가고
해갈할 수 없는 혼돈만 남아
깊이 주름 짓고 있는 거야
가끔씩 눈보라가
어루만져줄 때에야
비로소 사무치는 뿌리를 딛고
호소할 날들을 헤아려 보기도 하는 거야
나름 까닭 있는 몸짓인거야
♧ 겨울나무 - 제산 김대식
구름이 햇살을 잡아먹고
침통하게 찌푸리더니
햇살 같은 흰 눈을
하늘가득 토해낸다.
세월을 돌아
긴 여행을 하고 온 바람이
산을 넘고 돌아 와서는
어제의 사건들이 박혀있는
신문을 뒤적이곤
차가운 냉기만 불어내는데
추억의 껍질조차 털어버린
겨울나무가
짓궂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시~ 소리를 내며
홀로서기를 다진다.
마음이 서성이다 간 자리마다
하얗게 그리움은 쌓이고
앙상한 가지에도
새들은 또 와서 밀어를 나눈다.
♧ 겨울나무 - 김혜순
나뭇잎들 떨어진 자리마다
바람 이파리들 매달렸다
사랑해 사랑해
나무를 나무에 가두는
등 굽은 길 밖에 없는
나무들이
떨어진 이파리들 아직도
매달려 있는 줄 알고
몸을 흔들어 보았다
나는 정말로 슬펐다. 내 몸이 다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이 흩어져
버리는 몸을 감당 못해 몸을 묶고 싶었다. 그래서 내 몸속의 갈비뼈들이 날
마다 둥글게 둥글게 제자리를 맴돌았다, 어쨌든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내
몸 전체에 박혔어. 그리고 이건 너와 상관없는 일일 거야. 아마.
나는 편지를 썼다
바람도 안 부는데
굽은 길들이 툭툭
몸 안에서
봄 밖으로
부러져 나갔다
♧ 겨울나무 - 정군수
겨울이면
나무는 혼자이어야 한다.
가지를 놓지 않던 바람도
둥지를 짓던 새들도 보내야 한다.
보내야 할 것들을 보내고
벗어야 할 것들을 벗어버리고
왜 홀로인가를 생각하는
고독한 나무이어야 한다
겨울이면
나무는 혼자가 아니다
모든 생명들이
언 땅으로 문을 닫고
아무도 없어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어
겨울이면
세상은 나무의 것이 된다
♧ 겨울나무 - 우당 김지향
나무가 언덕을 데리고 내 귀에 와서
두근두근 귀를 두드린다
언덕에 내가 나와 심어지고
달빛 한 꼬챙이가
내 발부리에 꽂힌다
내 발이 새파랗다
나무는 겨울나무는 천개의 손으로도
내 발의 푸르름을 닦지 못하고
만개의 눈으로도
내 발의 깊이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나무는 겨울나무는
밤마다 나의 깊이를 재려
나의 귀에 와서
그 짧고 마른 손으로
두근두근
내 귀의 높은 층계를
깨뜨리려 한다
♧ 겨울나무 - 오경옥
떠난 후에야 내 모습이 보였다
어느 사이엔가
기억 깊이로 뿌리를 내린 의미들
푸르게 돋아
묶어두고 다독여온 것들이
눈부신 환상으로
색깔을 입혔던
익숙하게 길들여진 것들
심혈관들의 움직임이
안으로
안으로
낡은 습관과
허황된 관념들을 밀어올리며
가만히 들여다본다
어느 먼 훗날을 위해
냉정한 된바람은
사실과 실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며
오롯이 서게 했다
떠올려진 것들마다 의미된 것들이
비로소
하얗게
하얗게
맑은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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