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겨울호의 시

김창집 2012. 1. 4. 01:00

                                                                                                 * 겨우내내 꽃을 피우는 갯국

 

♧ 변함없이 - 문충성

 

요즘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때로

너만 있고 나만 있고

 

아내 위 수술 받으러 입원한 날

오지 말라고 그만큼 당부했는데

민정이가 왔다 격려위문금까지 챙겨놓고

갔다 손 흔들며

수술하는 날

문자매시지가 왔다

- 떨리세요, 겁보언니!

마음 편하게 먹고 힘내세요.

다 잘 될 거예요. 언니 파이팅!

                                          _민정

 

50년이 넘도록

지내온 그리움

그것을 우리는 우리 시대

우정이라고 하는가

한번 먹은 맘

변함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 마라도에서 - 김수열

 

다섯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세 통은 축하한다는 거고

나머지는 술 한잔하자는 거였다.

고맙다고 했고

지금은 마라도에서 유배 중이라 했다

 

배가 끊겨 섬이 가벼워지는 날이면

아낙들은 점당 백원짜리 고스톱을 치고

남정네들은 문어 삶아 술추렴을 한다

바쁘게 섬을 돌던 카트도 모처럼 주무시고 계시다

 

인터넷도 끊기고 에어컨도 돌아가지 않는다

내일이 백중인데 배가 끊겨 떡이 올 수 없다며

안 보살이 발을 동동 구른다

이번 부처님은 지지리도 먹을 복이 없나 보다

 

태풍 무이파가 몰려오던 날 어느 작가는

히말라야 산맥이 달려드는 것 같았다 했고

섬이 흔들려 심한 멀미를 느꼈다 했다

 

오후가 되자 바람끝이 점점 사나워지고

바다는 하얀 거품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내일도

섬은 가벼워질 것 같다

 

  

 

♧ 껴안아주었다 - 김광렬

 

쉰이 훌쩍 넘은 나이

이제 나는 늙어버렸고

큰 병이 들 거라고 생각했다

장미꽃도 화사하지 않고

풀꽃도 소담스럽지 않고

모든 것은 그저 소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바로 그때 번쩍

장미꽃이 내게 다가왔다

풀꽃이 손을 내밀었다

이름을 물으니 상냥하게

장미꽃이라고 대답해주었다

풀꽃이라며 씩 웃어주었다

내가 낙담할 때

장미꽃이 들판의 풀꽃이

그리고 수많은 작은 것들이

따뜻하게 나를 껴안아주었다

 

  

 

♧ 보물과 명소 - 김경훈

 

평화로라 이름 바뀐

산업도로 서귀포 방면 어느 교각은

이마에 이런 머리띠를 매고 있다

“여러분이 머무는 이곳은 전 인류가 함께 보존하는 세계의 보물입니다.”

민군복합이라 이름 바꾼

강정천 앞 해군기지 정문 펜스는

가슴에 엄숙한 흉장을 내밀고 있다

“아름다운 섬 제주도에 또 하나의 명소가 탄생합니다!”

보물 찾아 평화로를 불화없이 달려가면

전쟁이 산업으로 제 배를 한껏 불리고 있다

 

 

♧ 물매화 - 김경훈

 

그윽한 몰입(沒入)

몰아(沒我)의 황홀

 

그런 여자

당신은,

 

  

 

♧ 친구야 - 김문택

 

실직된 장애인하고 못살겠다고

집사람과 이별한지 아홉해

 

내 마비된 왼쪽이 되어주던 친구야

정겨운 내 친구야

 

오늘 창가에 세워둔

지팡이가 보이지 않거든

 

예쁜 겨울옷 갈아입고

아흔아홉골 산꼭대기로

눈꽃송이 구경간 줄 알아주렴

 

친구야

아름다운 내 친구야

오늘 내 방이 텅 비어 있거든

가벼운 운동화 신고

멋진 여자랑 손잡고

서귀포 바다로 유람선타고

뱃놀이 간 줄 알아주렴

 

친구야

그대가 불편한 왼손, 왼발이

필요하거든 언제든 불러주세요

그대의 손발이 되어드릴께요

 

  

 

♧ 개기일식 - 김영미

 

천천히 흐려지는 하늘

바람도 잠시 숨을 멈추는 시간

단, 4분의 애틋한 포옹을 위하여

달과 태양은 수십 년을 비껴가고

온 우주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고 난 후에야

한 몸이 되었다

 

너와 나

바람처럼 스치는 순간이 되고자

얼마나 많은 날들을

애태웠는지

 

바람이 가볍게 인다

서로 비껴 돌아서야 할 시간

달은 달만큼의 시간으로

태양은 태양만큼의 시간으로

수십 년을 보내고 나면

자연의 섭리로 다시 만나겠지만

 

너는 나와의 인연

기억이나 할까

 

  

 

♧ 우체국이 있는 거리 - 현택훈

 

  금요일 늦은 점심시간, 태양이 우체국 위에서 저공비행 중인 시간. 넥타이를

약간 풀고 올려다본 하늘. 우체국 위 하늘이 오로라처럼 청보라색으로 빛난다.

이젠 헛것이 보이나. 이것도 산재로 신청해야 하나. 탁상달력에 있는 아이슬란

드 오로라를 동경했더니 내 눈이 어떻게 된 건가. 아니면 김 부장 머리 벗겨지

는 소리인가.

  이 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것은 우체국이 산소호스를 거리에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산소호스를 타고 우체국을 들락거린다. 사실 편지는 주

술이다.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며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

마다 당집을 하나 둘씩 차린 것.

  하루는 수백 마리의 새가 떨어지는 꿈을 꾸고서 李箱탄생 100주년 기념 우

표를 샀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면 운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에 간 우체국에서 사람들은 모두 허기진 얼굴로 편지나 소포를 부치

고 있었다. 새가 떨어지는 꿈을 꾸면 바라던 일이 실패하게 된다는데 한 마리

도 아니고 수백 마리였단 말이다. 그날 저녁에 나는 야근을 했다. 우체국 여직

원은 무당처럼 이곳과 저곳을 연결해 주면서 태연히 스탬프를 찍는다. 나는 꿈

꾸는 나라로 가는 소인을 얼마나 많이 공중에 찍었던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

지 아이슬란드 항공 스튜어디스 사진이 페티시가 되어 화장실에서 수음을 했

다.

  유성우가 흐른다는데 창문을 열 수 없는 밤이 흘러간 것처럼 붙잡고 싶지만

보내야만 했던 계절들이 내게도 있었다고 위안을 삼을까. 이제 서류봉투 속에

알맞춤하게 들어가 있는 기억들은 주소 불명인 채 떠돌고 있는데 북해를 건너

는 음악이 흐른다고 했지만 그 음악을 차마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별똥별이

연신 떨어지는 밤하늘을 어떻게 목도할 수 있느냐 말이다.

  꿈은 위도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고 또 떨어지는 것인지. 이젠 유물처럼 느껴

지는 꿈의 무릎이 아프다. 레몬 향기 맡으면 이 꿈에서 깨어날까. 유언 같은 삶

도 그리 멀리 가지 못하지만 날자, 날자. 한 번 날자꾸나.* 마지막 주문을 부치

는 것이다. 고위도의 나라 그곳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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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자, 날자. 한 번 날자꾸나. : 이상의 소설「날개」중에서

 

  

 

♧ 굴참나무 빈집 - 양원홍

 

지난 봄

딱따구리 한 쌍

알을 품던 둥지

날개 돋아 날아간 빈자리에

박새 한 마리 날아들었다

 

바람으로 기둥을 세우고

그늘로 지붕을 엮은 빈집

 

산사의 숲속을 지나던 목탁소리

딱, 딱, 딱

굴참나무 구멍 속에 내려앉는다

 

박새가 자리를 비운 사이

빈집에

목탁소리가 둥지를 튼다

 

  

 

♧ 위궤양 - 강봉수

 

오늘도 한잔하자

졸라대는 기자양반

 

무슨 사연 버겁기에

2차 3차 끝이 없네

 

나도야

시름에 겹다

악살하는 위궤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