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시조 제19집 시조 1

김창집 2012. 1. 5. 00:33

 

♧ 빈집 - 김윤숙

 

낮은 돌담 함석집

자식들 출가시킨 듯

현관문짝도 떨어져

주인을 기다린다

저녁때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올랐을 집.

 

겨울 봄 지나 한여름

집 껴안는 담쟁이가

댓돌마루며 안방까지

손을 뻗어 나갔다

상처에

푸른 피 돌아

빈집이 웅성거린다.

 

  

 

♧ 신 한림별곡 - 김영란

 

전갱이 잔뼈 같은 어젯밤 하얀 꿈도

북제주 수평선도 가로눕다 잠기는

은갈치 말간 비린내 눈이 부신 이 아침

 

바람소리 첫음절이 귤빛으로 물이 들고

닻들도 기도하듯 조용히 기대 누운

기우뚱 포구에 내린 오십견의 저 바다

 

우리가 불빛들을 희망이라 말할 때

행성처럼 떠도는 비양도 어깨 위에

등 뒤로 가만히 가서 손 한 번 얹고 싶다

 

  

 

♧ 나비, 베토벤을 만나다 - 조한일

 

결 고운 왕나비 혼절하며 춘춤다

노란빛, 초록빛, 붉은빛이 아니어도

귀먹은

바다에 돛 올려

천재를 만난다

 

안단테로 나래치며 들어선 가을 속

달빛의 소나타 눈으로는 들었을

그 사람,

비문중과 같이

묵은 사랑 어른대는

 

한밤중 손끝으로 감아돌던 음률에

내 귀를 먹게 하고 내 눈을 멀게 하는

남루한

영혼에 들이친

나비 저 날개짓

 

  

 

♧ 숨비소리 - 강봉수

 

육신을 바다에 저당 잡힌 탓에

탐라의 하루는 바다에서 열리는가

오늘도

섬마을 아낙

툼벙, 바다에 든다.

 

쇠머리 성산 따라 차귀도 고산에서

호오이 숨비소리 해 쫓아 늘어지면

봉돌에

겨운 수평선

가뭇가뭇 스러진다.

 

  

 

♧ 가을비 - 강애심

 

낙엽이 떨어지듯 가을비 내린다

 

게걸음처럼 똑바로 못 걷고 지나온 날들

 

바람에 쓸려가는 비, 나는 가만 멈춰 선다

 

  

 

♧ 추사(秋史)선생 세한도(歲寒圖) - 고응삼

 

얼음장 이고서서 유배 살이 앓던 세월

찬바람 모진 밤이 즈믄 해를 에였듯이

추사님 갈필(葛筆) 묵향 그윽하니

천년 곰솔 눈꽃 마냥 흩날리고

세한도 애틋한 혼이 만고충절 일깨우셔.

 

임 향한 일편단심 산방산(山房山) 대좌하고

바람 빛 일렁인 백지장마다 추사의 얼을 갈며

사무친 대정고을 안성(安城) 옛터에

푸른 솔 역풍 지샌 임의 뜻이야

오가는 나그네 가슴마다 무량감회 천세만세 기립니다.

 

  

 

♧ 새천년비자나무 - 김대봉

 

천년을

살았어도

싱싱한 저 나무는

 

오름 하나

베고 살아

저리 젊었을까

 

몇 세기

겪어온 풍광

나이테로

감으면서

 

  

 

♧ 만추의 아소산 - 김영기

 

생을 다한 분지에는 화산탄 뒹구는데

올 가을도 기약 없이 한숨으로 지새는가

칼데라 신의 사랑이여, 끝없는 정염(情炎)이여!

 

하염없이 피워 올려 사위 가린 햇솜덩이

까마귀는 눈치 채고 넘지시 몸 숨기는데

금줄에 소원지 꽂고 두 손 모은 여인이여!

 

  

 

♧ 겨울 야누스 - 김진숙

 

하가리 연화정은 겨울 蓮의 누드화다

 

반쯤 잠긴 꽃대 사이로

비대칭의 무수한 뼈들

 

몸의 무늬를 읽는

실루엣이 부시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지우는 일

 

한 톨 씨앗까지

소신공양 사리를 묻은

 

산란 후 연어들처럼

꿈을 이루고 누운 노을.

 

얼마나 가벼워져야 빛의 지문을 그릴까

 

저 홀로 텃새 한 마리

그림자가 흔들릴 때

 

살얼음 생의 안쪽이

두 얼굴을 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