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집 - 김윤숙
낮은 돌담 함석집
자식들 출가시킨 듯
현관문짝도 떨어져
주인을 기다린다
저녁때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올랐을 집.
겨울 봄 지나 한여름
집 껴안는 담쟁이가
댓돌마루며 안방까지
손을 뻗어 나갔다
상처에
푸른 피 돌아
빈집이 웅성거린다.
♧ 신 한림별곡 - 김영란
전갱이 잔뼈 같은 어젯밤 하얀 꿈도
북제주 수평선도 가로눕다 잠기는
은갈치 말간 비린내 눈이 부신 이 아침
바람소리 첫음절이 귤빛으로 물이 들고
닻들도 기도하듯 조용히 기대 누운
기우뚱 포구에 내린 오십견의 저 바다
우리가 불빛들을 희망이라 말할 때
행성처럼 떠도는 비양도 어깨 위에
등 뒤로 가만히 가서 손 한 번 얹고 싶다
♧ 나비, 베토벤을 만나다 - 조한일
결 고운 왕나비 혼절하며 춘춤다
노란빛, 초록빛, 붉은빛이 아니어도
귀먹은
바다에 돛 올려
천재를 만난다
안단테로 나래치며 들어선 가을 속
달빛의 소나타 눈으로는 들었을
그 사람,
비문중과 같이
묵은 사랑 어른대는
한밤중 손끝으로 감아돌던 음률에
내 귀를 먹게 하고 내 눈을 멀게 하는
남루한
영혼에 들이친
나비 저 날개짓
♧ 숨비소리 - 강봉수
육신을 바다에 저당 잡힌 탓에
탐라의 하루는 바다에서 열리는가
오늘도
섬마을 아낙
툼벙, 바다에 든다.
쇠머리 성산 따라 차귀도 고산에서
호오이 숨비소리 해 쫓아 늘어지면
봉돌에
겨운 수평선
가뭇가뭇 스러진다.
♧ 가을비 - 강애심
낙엽이 떨어지듯 가을비 내린다
게걸음처럼 똑바로 못 걷고 지나온 날들
바람에 쓸려가는 비, 나는 가만 멈춰 선다
♧ 추사(秋史)선생 세한도(歲寒圖) - 고응삼
얼음장 이고서서 유배 살이 앓던 세월
찬바람 모진 밤이 즈믄 해를 에였듯이
추사님 갈필(葛筆) 묵향 그윽하니
천년 곰솔 눈꽃 마냥 흩날리고
세한도 애틋한 혼이 만고충절 일깨우셔.
임 향한 일편단심 산방산(山房山) 대좌하고
바람 빛 일렁인 백지장마다 추사의 얼을 갈며
사무친 대정고을 안성(安城) 옛터에
푸른 솔 역풍 지샌 임의 뜻이야
오가는 나그네 가슴마다 무량감회 천세만세 기립니다.
♧ 새천년비자나무 - 김대봉
천년을
살았어도
싱싱한 저 나무는
오름 하나
베고 살아
저리 젊었을까
몇 세기
겪어온 풍광
나이테로
감으면서
♧ 만추의 아소산 - 김영기
생을 다한 분지에는 화산탄 뒹구는데
올 가을도 기약 없이 한숨으로 지새는가
칼데라 신의 사랑이여, 끝없는 정염(情炎)이여!
하염없이 피워 올려 사위 가린 햇솜덩이
까마귀는 눈치 채고 넘지시 몸 숨기는데
금줄에 소원지 꽂고 두 손 모은 여인이여!
♧ 겨울 야누스 - 김진숙
하가리 연화정은 겨울 蓮의 누드화다
반쯤 잠긴 꽃대 사이로
비대칭의 무수한 뼈들
알몸의 무늬를 읽는
실루엣이 부시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지우는 일
한 톨 씨앗까지
소신공양 사리를 묻은
산란 후 연어들처럼
꿈을 이루고 누운 노을.
얼마나 가벼워져야 빛의 지문을 그릴까
저 홀로 텃새 한 마리
그림자가 흔들릴 때
살얼음 생의 안쪽이
두 얼굴을 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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