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이 겨울, 수선화가 핀 까닭

김창집 2012. 1. 21. 12:54

 

 

 

그제 배낭을 메고 가다가

이 제주수선화 무더기를 만났다.

그 빛이 하도 곱고

향기가 애처로워

배낭을 넘기고

다시 돌아와 마주했다.

 

이 겨울 바닷바람이 찬데

나비 한 마리 날지 않은 길섶에

너는 왜 피어 고독한 향기를 날리느냐?

 

 

♧ 수선화, 그 환한 자리 - 고재종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환한 꽃을 밀어올리다니!

 

거기 문득 네가 오롯함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 한라수선화 - 양전형

 

‘사랑한다’라고 하는 건

글이 아니다

말이 아니다

생각도 춤도 아니다

잔즐대는 웃음이거나 불서러운 눈물도 아니다

‘사랑한다’라고 하는 건

매서운 눈보라 힘겨운 날

너를 향해 이렇게

내 향기를 혼신으로 열며

가만가만 피는 것이다

마음의 길 따라 뜨겁게 올라와

그대 보도록,

그대 듣도록, 그대 맡도록

꽃으로 활짝 피어나는 일이다

 

 

♧ 수선화水仙花 - 유치환

 

몇 떨기 수선화…

가난한 내 방 한편에 그윽이 피어

그 청초한 자태는 한없는 정적을 서리우고

숙취(宿醉)의 아침 거츠른 내 심사(心思)를 아프게도 어루만지나니

오오 수선화여

어디까지 은근히 피었으런가

지금 거리에는

하늘은 음산히 흐리고

땅은 돌같이 얼어붙고

한풍(寒風)은 살을 베고

파리한 사람들은 말없이 움쿠리고 오가거늘

이 치웁고 낡은 현실의 어디에서

수선화여 나는

그 맑고도 고요한 너의 탄생을 믿었으료

 

 

그러나 확실히 있었으리니

그 순결하고 우아한 기백은

이 울울(鬱鬱)한 대기 속에 봄안개처럼 엉기어 있었으리니

그 인고하고 엄숙한 뿌리는

지핵(地核)의 깊은 동통(疼痛)을 가만히 견디고 호올로 묻히어

있었으리니

 

 

수선화여 나는 너 우에 허리 굽혀

사람이 모조리 잊어버린

어린 인자(人子)의 철없는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나니

하야 지금 있는 이 초췌한 인생을 믿지 않나니

또한 이것을 기어ㅎ고 슬퍼하지도 않나니

오오 수선화여 나는

반드시 돌아올 본연한 인자의 예지와 순진을 네게서 믿노라

 

 

수선화여

몇 떨기 가난한 꽃이여

뉘 몰래 쓸쓸한 내 방 한편에 피였으되

그 한없이 청초한 자태의 차거운 영상을

가만히 왼 누리에 투영하고

이 엄한의 절후에

멀지않은 봄 우주의 큰 뜻을 예약하는

너는 고요히 치어든 경건(敬虔)한 경건한 손일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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