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배낭을 메고 가다가
이 제주수선화 무더기를 만났다.
그 빛이 하도 곱고
향기가 애처로워
배낭을 넘기고
다시 돌아와 마주했다.
이 겨울 바닷바람이 찬데
나비 한 마리 날지 않은 길섶에
너는 왜 피어 고독한 향기를 날리느냐?
♧ 수선화, 그 환한 자리 - 고재종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환한 꽃을 밀어올리다니!
거기 문득 네가 오롯함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 한라수선화 - 양전형
‘사랑한다’라고 하는 건
글이 아니다
말이 아니다
생각도 춤도 아니다
잔즐대는 웃음이거나 불서러운 눈물도 아니다
‘사랑한다’라고 하는 건
매서운 눈보라 힘겨운 날
너를 향해 이렇게
내 향기를 혼신으로 열며
가만가만 피는 것이다
마음의 길 따라 뜨겁게 올라와
그대 보도록,
그대 듣도록, 그대 맡도록
꽃으로 활짝 피어나는 일이다
♧ 수선화水仙花 - 유치환
몇 떨기 수선화…
가난한 내 방 한편에 그윽이 피어
그 청초한 자태는 한없는 정적을 서리우고
숙취(宿醉)의 아침 거츠른 내 심사(心思)를 아프게도 어루만지나니
오오 수선화여
어디까지 은근히 피었으런가
지금 거리에는
하늘은 음산히 흐리고
땅은 돌같이 얼어붙고
한풍(寒風)은 살을 베고
파리한 사람들은 말없이 움쿠리고 오가거늘
이 치웁고 낡은 현실의 어디에서
수선화여 나는
그 맑고도 고요한 너의 탄생을 믿었으료
그러나 확실히 있었으리니
그 순결하고 우아한 기백은
이 울울(鬱鬱)한 대기 속에 봄안개처럼 엉기어 있었으리니
그 인고하고 엄숙한 뿌리는
지핵(地核)의 깊은 동통(疼痛)을 가만히 견디고 호올로 묻히어
있었으리니
수선화여 나는 너 우에 허리 굽혀
사람이 모조리 잊어버린
어린 인자(人子)의 철없는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나니
하야 지금 있는 이 초췌한 인생을 믿지 않나니
또한 이것을 기어ㅎ고 슬퍼하지도 않나니
오오 수선화여 나는
반드시 돌아올 본연한 인자의 예지와 순진을 네게서 믿노라
수선화여
몇 떨기 가난한 꽃이여
뉘 몰래 쓸쓸한 내 방 한편에 피였으되
그 한없이 청초한 자태의 차거운 영상을
가만히 왼 누리에 투영하고
이 엄한의 절후에
멀지않은 봄 우주의 큰 뜻을 예약하는
너는 고요히 치어든 경건(敬虔)한 경건한 손일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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