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개똥참외의 추억

김창집 2012. 1. 16. 00:00

 

지난 토요일. 대정읍 무릉리 전지동에 있는

나지막한 오름 보로미에 갔다가 이 녀석들을 만났다.

들어갈 때 마침 밭을 갈고 봄감자를 심고 있길래

미안해서 오름에 가는 길을 물었는데

순박한 아저씨 그냥 밭 위로 지나가랜다.

 

일행이 열두 명인데 미안해서 발을 들고 걷듯이

그곳을 지나 조그만 오름에 올라 주위를 살피고 나서

내려올 때는 조금이라도 건너는 부분을 적게 하려고

담을 넘는데, 이렇게 아직도 썩지 않은 개똥참외가 남아있다.

 

어렸을 때 먹을 것이 없어 이를 즐겨 먹었던지라

하나둘 줍는데, 고소한 냄새까지 미각을 자극한다.

지극히 못 살던 시기였기에 밭을 뒤져 저를 따먹으러

다니거나, 남의 밭을 넘어가다 잘 익은 것을 만나면

횡재한 것처럼 좋아했다. 일행 중에는 그것을 알아

관심을 가진 사람도 있고, 아무 것도 모르고 가버리는

측도 있어 격세지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 개똥참외 - 반기룡

 

명예도 자존심도 초개처럼 내 팽개쳤지

발길질 무서워 한쪽에 웅크리며 노란꿈 꾸었지

이끼처럼 음습하게 살아온 시간의 궤적

푸른 잎맥 훔쳐보고 무장무장 달려와

볼때기 마구 부비는 넉살스런 햇살 한 줌

햇살이 간지르면 노란 발작이 옹알이를 하지

아직 개화되지 않은 수줍은 배짱으로

온 몸을 땅바닥에 펑퍼짐하게 또아리 틀고

달빛 불러 애무하고

햇볕 불러 일광욕하면

어느새 노란옷으로 색깔을 달리하네

보는 이 없어도

찾는 이 없어도 나의 노란 꿈이 익을 때까지

퇴적된 자양분 먹으며 꼿꼿한 몸치장하고 또 해야지

 

 

♧ 개똥참외 - 김순진

 

지지리도 모래알 같은 수수야 조야

사팔뜨기 동부야

또 하나의 상형문자

외톨박이 도토리야

내가 아무리 보잘것없기로서니

말도 걸지않는 바랭이야

 

너희들 모두 한통속이고

나만이 왕따구나

외로워 노래졌고

기다림에 달아졌다면 믿겠느냐

 

소 풀 뜯기던 아이는

나를 가장 반기는도다

추억 살라 불깡통 돌리며

동네 한 바퀴 돌고 싶다

저 소년아

 

 

♧ 개똥참외 - 윤인환

 

고향이 어딘지

누가 씨앗을 뿌렸는지

묻지 말라.

 

이 세상에 왜 태어 났는지

우주 끝자락

넓고 넓은 대지에서

하필이면 냄새 나는 두엄 가에

어찌 누워 있는지

중요한 건

곰팡이 핀 족보가 아니라

이 시간 숨쉬며 존재 한다는 것

 

별이 빛나는 새벽마다

이슬을 기다리는

작은 희망 속에 있는 것

 

외롭고 슬프지 않는냐고

사는 게 힘드냐고

이것저것 묻지 말라

 

애처로이 기억하려 애쓰지 말라

 

이렇게 사는 것도

우리네,

또 하나의 삶일 테니까.

 

 

♧ 개똥참외 - 우공 이문조

 

텃밭 가장자리

스스로 태어나

스스로 자란

개똥참외 한 그루

 

보살피지도 않았는데

정 주지도 못했는데

노오란 참외가

탐스럽게 열렸네

 

이름은 비록

개똥참외이지만

맛은 일품일세

 

허울만 그럴싸한

사람

많은 세상

개똥참외

네가 그리웁구나.

 

 

♧ 개똥참외의 추억 - 허명(허광빈)

 

  初伏초복 - 夏至하지의 지리한 뙈약볕이 이글거리는 여름으로 누워있다. 녹음의 숨통을 조이며 끈적한 더위는 정오에 졸고, 지나가는 장대비는 칠월칠석 오작교 아래 갈라진 거북등짝 위로 등목을 즐긴다. 잎새는 무거워 몸을 축 늘어뜨린다 노파의 굽은 허리춤의 바구니 안에 푸른 생명 하나 움을 튀운다 붉은 노을 사이로 아이를 태운 소가 한폭의 동양화를 채색한다.

 

 

  中伏중복 - 長魔장마가 그치고 파아란 줄기 하나 땅 위를 기어간다 여름은 노오란 꽃닢으로 힘줄이 붉어진다 세상소식 끊긴 휘청거리는 오후, 할머니는 벌, 나비를 따라 어느새 기나긴 여정의 열매를 본다 그 틈에서 뒤척이는 작은 참외 하나 밭 이랑 사이 몸부림의 흔적으로 많은 눈길을 얼마나 깊이 삼켜야 했는지 모른다 정오가 그림자를 구겨넣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 부으면 가슴팍 여린 속살을 헤집고 연두빛 얼굴이 노랗게 눈웃음을 친다.

 

 

  末伏말복 - 入口입구, 매미의 눈부신 울음줄기로 햇살을 추스린다 노파의 기억은 옛 추억으로 짙어가고 소를 몰던 아이들 맑은 계곡물 따라 가재잡기에 천진스럽다 눈웃음만 가볍게 묻히고 한가로운 걸음 재촉이며 콧노래 흥겨워 부드러운 손길 숨죽이고 그 사뿐한 몸짓 치마폭에 문대어 한입물고 이 작은 열매의 침묵 앞에 얼굴이 붉어진다 그 곁에 수없이 새겨진 흔적의 임자들과 내 어린 날의 솜털 보송한 얼굴이 가끔은 그 주위를 맴돈다 흙냄새며 물소리 추억으로 품어 놓았던 개똥참외의 향기가 몸을 흔들던 내음처럼 달콤하다. 그 씨앗들 후욱 떠나 어디에서 작은 추억의 싹을 튀우는지

 

 

♧ 치미는 생각 - 강세화

 

요긴치도 않은 일로 나날이 언짢아도

어쩌다 실비는 어영부영 내리지만

풀리지 않는 생각만 부질없이 머리들고 일어나

막연히 안마당을 바라보다가

막자란 철쭉나무 그늘에 멀쑥하게 껑충 돋은

연한 새싹 하나를 찾아냈다

 

비쭉왜쭉 벋어있는 나무 그늘에서

솔깃한 초록빛 수박싹을 만나서

가만히 생생히 환해지는 마음 한 켠에는

놀라와 외면 할수록 커다랗게 덤벼오는

한 덩이에 몇 만 원짜리 수입 메론이

모처럼 살뜰한 기분을 그르치고 있다

 

일찌감치 몰려나온 첫물 수박 한 덩이를 얼싸안고 들여와서

어련히 맛보고 서근서근 돌아보여

주섬주섬 거두어서 짐짓 던져둔 씨앗들이

일없이 지내다가 무심코 비오는 날

솔솔한 파란 싹의 소망도 무색하게

안으로 밖으로 나를 멍하게 한다

둥실한 원두막 아래 실한 덩굴이 암만 대견해도

밭고랑 너머로 마음만 간절했지

수박 한 덩이가 손쉽지 않던 때에

텃밭가 두엄더미 곱게 깔고앉아

이쁘게 익어서 귀하던 개똥참외 생각이

오죽잖은 마음에도 어기차게 꿈틀꿈틀 치밀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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