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와 집안 아이들 일로
며칠간 서울 나들이를 하고 돌아왔다.
할 일도 많고 쓸 것도 많은데
차분히 정리할 수 없이 시간만 흐른다.
남들은 겨울이 한가해 여러 가지 정리를 한다지만
왜 연말연시가 이렇게 어수선한지 모르겠다.
겨울이 막바지에 다다라 마지막 추위가 떠나지 않지만
저 야자수들은 그런대로 싱싱한 모습이다.
제주의 가로수나 공원, 식물원에 심어진 종들은
워싱토니아, 카나리아야자, 종려나무, 유카, 소철 등이다.
♧ 삶 - 고혜경
해풍에 곳곳한 야자수 잎
바람보다 먼저 눈을 뜬다
한 뼘 더 자란 아들의 키 만큼
햇살로 한 살의 나이가 채워졌다
빨래를 베란다에 널고 개는 동안
흐린 구름이 젖은 빨래에 누워
한 줌 햇살로 몸을 말린다
구름에 뭉개진 일상 너머 비가 내린다
빗 속을 서성이는 눅눅한 습성
때론 못 견뎌 골이 패인 자리
발자욱마다 길들여진 고랑
한 길로 트여 새 길로 흐른다
축축함에 늘어진 세월
시간의 마른 옷을 골라입는다
한 나절이 지나거나 혹은 며칠이 걸려
다시 한 줌 햇살로 몸을 말린다
어둠 속의 아침이 세상을 열고 닫는다
삶은 편안한 옷 한 벌 갈아입고
그 속에 들어가 피와 땀을 적시는 것
신문이 새 옷을 입고 아침에 접속할 무렵
또 다시 한 줌 햇살로 몸을 말리겠다
♧ 제주도 이미지 - 최진연
아침이면 대합 껍데기로
무쇠 가마 밥솥을 긁는 어머니와
성산포 해맞이가 생각난다.
시원한 소낙비에 동동 떠나가는 물가마와
해파리들의 정오
태양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흐르고,
저녁에는 용 한 마리가 등천하는 서쪽 하늘과
한라 산록에 풀을 뜯는 조랑말들의 평화
동굴 속에서 밀회하는 비바리들
용암만큼이나 뜨거운 방언들이 떠오르고,
언제나 전복 속껍데기처럼 영롱한 환상을 잡는
갸름한 접시 안테나, 또는
어디서나 바다가 보이는 안락하고 우아한 침실
여인의 허벅살에 검푸르게 돋아 있는
관능의 사마귀가 생각난다.
플랑크톤을 먹은 내장이 들여다뵈는 물벼룩들
옥돔들이 유영하는 바다 위에
백록담만한
활엽수 한 장이 떨어져 출렁이는 게 보이고,
물질하는 여인들의 휘파람 소리와
남태평양을 향해
손을 흔드는 야자수들과
어디서나 만나는 정다운 우리 이웃
얼금배기 돌하루방의 아기 같은 웃음이 떠오른다.
♧ 제주 해안(88) - 손정모
주상 절리로 가는
가파르고도 높다랗게 펼쳐진
해안 절벽에는
바람에 파랗게 젖어
연신 몸을 떨어대는
해송들의 군락이 남실댄다.
해송에 뒤질세라
곳곳에 자리잡은 야자수들
미풍에 휘감길 때마다
허연 몸매를 드러내고는
솔숲과 어우러져
군무를 추다가
석양이 질 때마다
눈물 글썽이는 얼굴로
잠자코 바다를 내려다본다.
♧ 애정 결핍증 - 권오범
분홍 햇빛 조명에 물들어 몽롱한
옷이란 숫제 없는 극락세계 바다
청춘만이 볼만장만 스치는 모래톱엔
이랑져 밀려들어 설레게 피고 지는 메밀꽃
야자수 아래 벤치에 누워
투명유리벽 속 구경하다보니
콧노래와 샤워하는 약관의 내 또래 여자
어디서 본 듯한데 누구더라,
눈 감고 곰곰이 전생의 업 되작이는 순간
소방 비상벨이 대성통곡해
시공을 초월해버린 후덥지근한 바람벽안
비몽사몽 소낙비 소리가 억수 같다
속이 허한 걸까,
식은땀에 젖어 아쉬움 끌어당기다보니
어느새 티브이 속으로 들어와
아직도 샤워 중인 저 여자
♧ 엘도라도 섬 - 권영민
꿈의 지평선은
아득히 달려가는
남도 끝자락에 깃발을 편다
처음 안기는 뱃고동소리
사람들의 가슴에
푸른 물결을 적시고
갑판 위에 줄지어 선 차들은
뱃길을 따라 흘러간다
가끔씩 이국의 향수를 담고
어서오라 손짓하는
야자수 가로수 길
엘도라도 섬에 닿는 길은
시간조차 쉬어가는
꿈의 휴양지
바쁘게 달려온 발길이
빈자리에 다투어 누어
가쁜 한숨을 몰아쉰다
창문을 밀치어드니
한 점 푸른 바다 그림을 펼친다.
'디카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춘화 봄을 맞으러 (0) | 2012.02.17 |
---|---|
겨울을 견디는 꽃 - 산국 (0) | 2012.02.16 |
별꽃 봄 햇살에 기대 (0) | 2012.02.11 |
추위를 태우는 불꽃 (0) | 2012.02.10 |
눈 속에 서향 향기 솔솔 (0) | 2012.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