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봄호의 시와 산철쭉

김창집 2012. 4. 11. 00:15

 

제주작가 봄호(통권 제36호)가 나왔다.

지난 1월에 있었던 ‘글발글발 평화 릴레이 - 임진각에서 강정까지’를

특집으로 하고, ‘공감과 연대’로 다른 지역 다섯 작가의 시를,

‘작가를 찾아서’는 평론가 고명철을 다루었고

포토에세이 - 김광렬의 ‘사람꽃’을 실었다.

 

시는 김광렬 김경훈 김성주 김세홍 진하 김문택 김영미 현택훈 양원홍

시조는 오영호 장영춘 이애자 홍경희 김영란

수필 문영택, 소설 고승완, 연작소설 한림화,

장편연재 조중연, 동화 김순란, 제주어 산문은 이애자가 썼다.

그 중에 먼저 시 한편씩을 뽑아

이제 막 피어난 산철쭉과 함께 올린다.  

 

 

♧ 고기국숫집에서 - 김광렬

 

세 부자가 고기국숫집에 깃들었다

아비는 늙은 노새를 닮았다

어디서든 권위가 안 설 것 같은,

머리털이 몽당비자루 같은,

밑바닥 세월 견뎌가는 듯한,

왜소한 아비와 함께 온 두 남매가

쑥부쟁이처럼 고왔다

아비가 자식들의 그릇에

말없이 돼지고기 한 점씩 얹어주었다

나는 소싯적 찌든 아비를

얼마나 부끄러워했는가

가슴에 아리게 면도날이 서는데

서럽긴 해도

저들은 덜 아프겠다

 

 

♧ 이 펜스를 걷어라 - 김경훈

    -- 강정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에서

 

이 펜스를 걷어라

이 비열한 야만의 장막을 걷어라

너희가 세운 이 흉물 너희 손으로 걷어라

 

이 철망을 걷어라

너희가 너희 스스로를 묶지 않으려거든

이 더러운 폭력의 장벽을 당장 걷어라

 

이 사슬을 걷어라

너희가 너희 명을 재촉치 않으려거든

이 천박한 야욕의 산성을 냉큼 걷어라

 

이 말뚝을 걷어라

돌멩이 하나가 구럼비 되어 일어서고

꽃 한 송이가 거대한 덩굴로 물결치리니

 

이 펜스를 걷어라

너희 굳은 심장에 가 박히기 전에

너희가 박은 이 말뚝 너희 스스로 걷어라

       

 

♧ 설국 - 김성주

 

어깨 위에 내려앉은

함박눈 한 잎

작고 가볍고 하찮은 한 잎의 흰빛이란

너무도 사소한 것이어서

집으로 들어와 혼자 술을 마신다

무어라 꼬집어 말하는 것은 아니고

‘더럽고 아니꼬운 세상 제발 뒤집어져라’

주정을 하다 잠들었는데

신 새벽

저 완벽한 혁명  

 

 

♧ 카페 품사 - 김세홍

 

  非문법적으로 살고 있는 백수k가 있다

  그가 카페 품사로 들어섰을 때, 여급이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주며 다

음과 같은 말을 했다

  바람이 꽤 부나 보네요

  그의 이마를 간잔하게 빗겨주는 순간, 여린 팔목에 비껴간 한줄 흉터를 보았

던 탓일까

  로션을 바른 살내음이 결기를 굳게 한 탓인지

  지금 이 순간 이후 형용사로 살기로 하고

  ‘방금 스쳐간 바람이 어떤지 나는 잘 아오’라고 동사형으로 넘어가는 모양

새를 취하는 순간,

  뒤따라 들어온 대머리 중년의 어깨를 털어주며‘오빠 오늘 고독하게 보여’

라는 형용사형 말투를 듣고

  자립명사형으로 돌아오는 k가 탁자에 앉자마자

  보통명사형 눈빛을 가진 30대 남자가 둘, 부사형 가슴을 가진 여자 한명, 또

한사람의 의존 명사형 여자 하나가 정세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이십대의 투표율을 이야기 할 때 조악한 문장이긴 하나 봐 줄만 했고

  복지 포퓰리즘으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문장이 흩어지는 것인데

  어찌 된 일인지, 오래된 문장을 꺼내어 순식간에 밀린 교정을 보는 듯

  부사형 가슴을 가진 여자가 오늘따라 필체가 다른 말투를 가진 조사형으로

변한 남자에게 짐승같은 새끼라고 소리치며 얼굴에 맥주를 뿌린다

  카페에는 눈이 쌓일 것 같은 예감에 손님 발길도 더 이상은 없고

  일순 한곳으로 몰리는 집중 교정으로 오래된 문장을 이어가는 그네들의 허

술한 문장은 단숨에 거덜나고 만다

  졸라, 얼빵없네, 니기미 따위의 비문을 연발하던 여자 둘은 더 이상의 문장을

만들기 힘들다는 듯 가방을 챙긴다

  다른 쪽 테이블에선 조사형 여급은 백수k의 감탄사와 궁합이 아주 잘 맞는 듯

했고

  대머리 중년은 꿀 발린 정확한 단문을 장기삼아

  또 다른 여급의 감탄사를 줄줄이 받아먹곤 했는데

  그게 다 자본 따라 가는 삼천리형 문장이라는 사실은 다 아는 터

  非문법적으로 살고 있는 당신,

  오늘 하루를 되짚어 봤을 때, 만일 당신이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문

장은 비교적 맞는 것인데

  이런 날 정확한 문장 연습은

  세상 어둠을 백지 삼아 써 내리는 함박눈을 필사하는 것이다  

 

 

♧ 니체를 읽다 - 진하

 

나는 니체를 안 읽는다

다만 책의 제목만 읽는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음악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 이후

선악을 넘어

도덕의 계보는

반시대적 고찰과

우상의 황혼 속에서

즐거운 지식이 되리니

힘의 의지란

코카서스 산정의 나무 그루터기처럼

아침놀에 빛나리니  

 

 

♧ 새 순 - 김문택

 

임진년 용두암에서

입춘 바람이 부는 날에도

그냥 절망에 빠진

새순이 아닙니다

죽었어도 벌써 죽었을

한그루 초라한 버려진

누룩나무 분재

작은 뿔 달고

조심스레 방문했습니다

초록 눈 가진

새 기쁨

푸른 춤추며 깨웠습니다

이제 집 생겼다며

기쁜 입춘 성령 충만으로

불러 일으켰습니다

 

 

♧ 블랙 - 김영미

 

가장 어두울 때 가장 빛나는 색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밝았다

 

블랙은 깊은 침묵이다

말은 가슴에 둘수록 고귀했다

 

블랙은 양심을 깨우는 이단이다

입보다는 가슴이 뜨거워야 했다

 

블랙은 이유 있는 반항이다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강하다

 

블랙은 낮은 곳의 가득함이다

눈으로 보지 않았기에

더 많은 것을 보았다

 

블랙은 감내하는 아픔이다

세상과 사람의 반쪽은 늘

한 가지로 어두웠다

 

어둠은 거울 속의 나였다

욕망, 불행한 욕망이었다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한

가슴 속 열망의 다른 말

블랙

 

그리고 너였다

검은 혀를 가진 너  

 

 

♧ 신촌 가는 옛길 - 현택훈

 

 도비상귀도 지나간 길. 연지, 분, 머릿기름, 거울, 빗, 비녀, 바느질함이 험치

따라간 길. 원당사 돌탑은 이끼가 푸르고, 송이 밟는 소리 먼 옛날로 설화처럼

흐르는. 고려 때 목호가 거미줄 같은 눈물을 치며 걸었을 길. 패망한 나라로 갈

수도 없고, 올레 끝집 복숭아 닮은 양씨와 조천포구 부근에 집 짓고 살려고 해

신디. 아즈방은 두린아이 손 잡고, 아즈망은 동골락동골락헌 곤애기를 등에 업

고. 셋아방집 가는 길. 식게 밥 먹으러 가는 길. 무밭을 지나고, 환삼덩굴 우거

진 풀숲을 지나고, 난리 때 죽은 말젯아방 얘기허당, 뭍에 가서 소식 뜸한 족은

아들 걱정허당 보민. 와흘 너머에서 들려오는 여호 울음. 바지춤엔 도깨비바늘

이 달라붙어있고. 삼양에서 신촌 가는 길. 동카름 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밤

바람. 옛날이야기처럼 구불구불한, 신촌 가는 옛길.

       

 

♧ 꿈을 깁는다 - 양원홍

    -- PD일기 1

 

  마침표가 없는 말들을 잘라낸다

 

  평생 땅이나 파먹을 팔자려니…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린 체념을 솎아내고,

가지가 휘도록 매달린 땀방울을 쳐내고, 이파리와 이파리 사이에 풍기는 막걸

리 냄새를 잘라낸다. 빚은 늘어나도 밥 세끼 굶어 죽지 않는다고… 통증이 칭

칭 감겨오는 다리 사이로 끝없이 뻗어가는 가지들을 토막친다

 

  편집실에서 농부와 리포터 틈에 낀 혀들을 잘라낸다. 혀끝에 딸려온 한숨 끝

에 간당간당 흔들리는 꿈을 이어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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