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남방바람꽃과 시낭송회

김창집 2012. 4. 27. 07:12

 

엊저녁에는 제주詩사랑회가 주최하는

81번째 시낭송회에 다녀왔다.

 

7시부터 시작된 이번 낭송회는

애월문학회를 초대하여

산지천 해상호에서 있었다.

 

시를 더욱 맛깔나게 하는 그녀들의 목소리에서

조화造花에서도 향기가 나게 하는 감성이 느껴졌다.

 

모두 10편의 시가 낭송되었는데

그 중 몇 편을 골라

어제 찍어온 남방바람꽃과 함께 올린다.    

 

 

♧ 여는 말 - 회장 김장명

 

사월이면 T.S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 의 ‘죽은 자의 매장’

첫 행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이라는 싯 귀절을 만나게 됩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눈부신 봄은 왔지만 현실 세계의 고뇌와 절망을

담은 그의 시처럼 사월이면 역사의 잔인했던 아픔들을 되새기게 되어

슬픔과 애처로움으로 더욱 가슴 저며 오게 합니다.

특히 제주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4.3의 아픔이 깃든

달이기도 하여 봄은 왔으되, 봄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81번째 맞는 詩가 흐르는 산지천의 목요일 행사에 참여해주신

관객 여러분들과 함께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들을 소리 내어

 

읽으며 기우뚱해진 정신과 몸이 바로 서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이번 초대 문학단체인 애월문학회 동인들과

시의 정원에서 만나게 되어 더없이 마음 설레어옵니다.

 

애월(涯月), ‘물가에 비친 달’이라는 뜻의 지명으로 불리는

시적인 느낌이 몹시 와닿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애월문학회 여러분과 함께 하게 되어 행복합니다.   

 

 

♧ 포구를 찾아서 1 - 김영란

     --애월포구

 

오늘의 허용치만큼

바다도 빗장을 풀고

한계 넘는 음역 어디

비릿한 파도소리

수평 끝 저문 하늘에

칸나꽃이

피었네

 

등대와 등대 사이로

문득 번진 그리움

눈매 고운 열사흘 달

등 뒤로 와 기대면

바다도 머릿결 곱게

포구에 와

안기네

 

저만큼 등대 따라

하나둘 돌아오네

더 큰 자유를 위해

외로움 키우던 불빛

애월리 나직한 포구에

키 높이는 초록 등    

 

 

♧ 그림자 1 - 김종호 시

      --중보의 기도

 

소리 없이 비가 내린다.

비에 젖어 꿈틀거리며 결핵균처럼 수척하여가던 것들이

일제히 일어나 줄줄 비를 내린다.

푸른 용수철 탱탱 튕길 때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바람의 들판에 나무 한 그루, 그 그늘에

웅웅, 바람소리 울며 오는 네 눈빛

줄곧 뒤를 따라온, 나 보다 더 서러운 그림자.

기쁘다거나 슬프다거나 어느 순간도 없이

투명한 손으로 늘 상처를 어루만지는 네 눈빛

사는 날 동안 기억조차 없는 너는 늘 그랬다.

봄 동산에 아지랑이 자욱한 날엔 꼬리를 자르고 보이지 않더니

먼 해조음이 뒤척이는 밤,

비오는 날에야 눈을 뜨고, 새벽마다

모르게 혼자 흐느끼는 중보仲保*의 기도,

너는 네 것이 아니라며, 하늘에서 비는 내리고

사랑은 아무도 모르게 뒤에서만 내리고 있었다.

---

* 중보의 기도 ; 누구를 위하여 남모르게 드리는 기도.  

 

 

♧ 구엄리 소금빌레 - 김성주

 

마지막으로

동쪽 읍내를 등지고

소달구지 하나 덜커덕덜커덕 西로 갔다 하네

 

소금 한 톨 없는 소금빌레

삶이 박제된 한 무리의 석상들

족쇄로 채워져 있네

주상절리와 주상절리 여와 여 사이 버둥거리는

파도의 속내를 알 수가 없네

족쇄를 풀려는지 옥죄려는지

 

아버지 마지막 걸었던 길

지금 나 걷고 있네

읍내 장터로 가는 소금달구지

소금 삶는 가마솥의 연기

아이들 웃음소리에 밟혀 순해지는 파도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동전 한 닢

찾을 수 없네

 

건너편 동양콘도에 관광버스가 들어오네

질펀하게 연애 밭 일구겠네

내 연애, 배춧잎에 뿌려진 소금 같은 것이어서

저 석상들에도 무슨 그런 연애가 있는지

가슴이 저릿저릿하네

 

옛날부터 전해오는 할아버지의 얘기 믿을 수 없네

비오는 밤이면 저 석상들이 깨어난다는 말

세상의 소리들을 깨끗이 쓸고 닦은, 한밤중

소금빌레에 햇볕 들고 소금 굽는다는 말

믿을 수 없네

서럽도록 믿을 수 없네 

 

 

♧ 상수리나무의 꿈 - 홍성운

 

상수리나무는 하늘을 오르고 싶을 때

깊숙이 뿌리박고 물관을 부풀린다

신새벽 빳빳한 잎사귀에

이슬을 앉히나니

 

메숲지는 봄산에 깍지 푼 바람이

가볍다 가볍다 우듬지를 흔들어댄다

풋씨방 바람을 물어

풍경소리 여무는

 

직선의 삶이지만 나이테를 감을 수 있다

깃 고운 박새 한 쌍 가슴에 둥지를 틀어

한 시절 푸른 목청을

대신 울지 않는가

 

무허가로 꿈을 꿔도 한데에선 탈이 없다

생장점이 팽팽하게 노을 휘젓는 가지들

순금빛 하늘을 닦아

별빛 쐬고 싶은 거다.  

 

 

♧ 늘 어머니 등에는 소금밭 있었네 - 문경훈

 

삼태기 씨앗 가득 담으니

어머니 얼굴은

환한 꽃이 피고

자갈밭 쟁기질하는

아버지 얼굴에

어머니 얼굴 꽃이 되네

 

높다란 언덕 배기

작은 텃밭

어머니 웃는 모습에

무겁게 짊어진 소금밭

 

흐르는 물처럼

썼다 들었다

등줄기에 흐르는 물

그것조차 막으려고

소금밭 지키며

아버지 쟁기질 소리에

울고 웃는 어머니

 

소금밭 속에서

꽃을 만드는

어머니 숨결 그리움!

     

 

♧ 산에 언덕에 -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行人)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쳐다볼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