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흰달개비와 우리詩 9월호의 시들

김창집 2012. 9. 23. 00:54

  

일주일 전, 거슨세미에 갔다가

이 흰달개비를 보았네.

평생 네 번째 본다는 말에

듣는 사람은 웃더라만

정말이었네.

 

난초도 소심을 알아주듯이

흰빛이 뿜어내는 그 순결한 느낌

저 녀석이 징그럽게 질긴

파란색의 원종과 같은 종이라 해도

저것을 보기가 어려운 것처럼

보고 또 봐도 신비로울 뿐이네.  

 

 

♧ 라산스카 - 김종삼

 

바로크 시대 음악 들을 때마다

팔레스트리나 들을 때마다

그 시대 풍경 다가올 때마다

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

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

라산스카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  

 

 

♧ 여생 - 송문헌

 

누구는

늦가을 들녘을 스쳐가는

‘마른 바람결 같은

구슬픈 음색이다’고 했던가

베니아미노질리의

노래 ‘시칠리아 마부의 탄식’이

11월 문턱 너머로 이별처럼

멀어져 가고

쟁그랑! 쟁그랑!

추녀 끝 풍경이 가만가만

또 하루

네 몫의 내일이 다가왔다

귀띔해 주네  

 

 

♧ 고통 - 박원혜

 

가슴에 하나 가득 고통이 담겼다

토해내고 싶은데 나오질 않는다

울음도 가득

멍도 가득

가득 가득이다  

 

 

♧ 추수감사제 - 도경회

 

흰 매화 같은

어머니는

젊어 편마비를 앓았다

 

그 몸으로 더운 못밥을 내곤 하셨다

 

겸허하게 땅에 입맞추며 한철 내내 흘린 땀으로

강누 들판 동쪽 귀퉁이가

온통 금빛 물살로 출렁이고

 

곡식의 낟알보다는

더 많았을 땀방울

비손질 같은 신성한 노역에도 잡히지 않는 세월

 

남모르는 어머니의 피와 땀과 눈물

보배인가

하느님이

아직도 풀 꿰미에 구슬처럼 꿰어가며

장엄 축복하시는  

 

 

♧ 시가 오지 않는 날은 - 강태규

 

보지 못하거나 보이지 않는 위안이라든가

안식을 비켜서 칠흑 같은 산을 걷고 싶다

 

어제의 초록은 환시일지라도

별빛들의 그늘이라도 거느려보고 싶다

 

숲가지에 빗겨 내리는 달빛도 좋아

날짐승이 제 고향말로 짝을 부르고

물소리 미끄럼 타듯 제 골짜기말로 부풀어 내릴 때

눈을 열고 그들과 나의 모태어에 귀 기울일 것이다

 

킬로만자로를 찾아가는 헤밍웨이 같고

알프스를 오르는 돌화살에 다친 청동기 전사처럼

벼랑 같은 다짐으로,

‘폴레 폴레, 하쿠나 마타타’

천천히 가면 문제가 없다는 스와힐리어 주문을 욀 것이다

 

저잣거리 고향 잃은 사람의 말들

귀신도 못 알아들어

하늘에 닿을 소리 없는 듯도 하여

윤중호 시인처럼 귀신도 펑펑 울 노래 한 번 불러도 보고

이성선과 이성부의 산 노래 듣고도 싶어

 

사원에 머무는 목탁소리의 눈부신 비상飛上 속에서

사원 밖의 나는,

쓰임새 없는 말만 중얼거린다

 

시타래 도무지 풀리지 않는 날은

가야지, 산으로   

 

 

♧ 연밭에서 - 임보

 

1

 

수만 평의 연밭에 빼곡이 들앉은 수만 그루의 연들을 보고 있노라면,

광화문 네거리 맨땅 위에 주저앉아 붉은 띠를 머리에 동여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수만 명의 붉은 악마들이 떠오른다.

붉은 악마에 맞선 푸른 승려군단 같다.

어디서 무슨 경기를 벌이고 있기에 뙤약볕에 나앉아

저리도 눈부신 축포를 터뜨리며 이리 야단법석이란 말인가.

천상의 어느 연화세계에서 지금 신나는 축구경기라도 벌이는 모양이다.

은하컵을 놓고 <전갈>과 <사자>가 한판 맞붙고 있는가?

대형 중계 스크린을 걸어놓지 않아도 그들은 잘 보고 있는 듯,

하기사 솥뚜껑 같은 푸른 원형 안테나를 제 각기 몇 개씩 매달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귀가 먹어 그들의 왁자지껄한 환호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개구리 놈들은 연상 알아차리고 여기저기서 툼벙 점벙 난리들이다.  

 

 

2

 

연밭에 수만 그루의 연들이 푸른 잎을 앞세우고 앉아 있는 걸 보면

방패 뒤에 숨어 포진을 하고 있는 중세의 병사들이 생각힌다

무엇을 향해 저리 삼엄한 진을 치고 있단 말인가

빛의 화살들이 푸른 방패 위에 쏟아져 내린 걸 보노라면

천상의 어느 군병들과 힘을 겨루고 있는 것만 같다.

진중에선 붉은 나팔들이 여기저기서 터지며 진군을 보채지만

한 발짝도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놈은 없다.

제트기처럼 날랜 제비들이 허공을 스치며 지나가고

몇 놈의 잠자리들이 헬리콥터 시늉을 하며 맴돌아도

무저항의 평화군단은 미동도 없다

종일 화살을 날리다 지친 천상의 군병들도

어쩌지 못하고 마침내 노을 속에 붉게 묻히고 만다.  

 

 

♧ 비! 웃네 - 권혁수

 

내 얼굴이 그립다 달려드는

비! 무서워 도망가네

도망가 비겁하게

어디로 가든지

그 목소리 따라오네

따라와 내 기억 속을 마구 흔드네

비! 바람 불어 나 흔들리네

흔들리며

서 있네 온통 눈물뿐인

그의 상실이 내 눈에 ㅎ르네

내 얼굴 어루만지네

나, 비! 속을 걷네

비! 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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