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장애우들과 함께 걸을 길을
미리 살피려고 삼다수 숲길로 들어가다가
바람에 힘차게 휘날리는 억새를 보았다.
이번 주 몇 차례 오른 오름 능선에는
세 차례의 태풍이 갈가리 찢어놓은 억새가
그래도 하나둘 피어나 가엽게 휘날리거나
그대로 말라버리거나
아직도 상처난 꽃 이삭을 품고 있다.
하지만 목장 울타리를 의지하여
끈질기게 버틴 이 억새들은 이렇게 피어나
초가을의 하늘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 억새꽃 - 구재기
나는 아직도 매일처럼
운명보다 진한 만남으로 피었다 진다
흔들리는 나의 작은 가슴에 가득
소리 없는 꽃잎으로 피었다 진다
반도의 땅 산비알 밭둔덕에
내 너를 위해 한 방울의 땀을 흘릴지니
새하얀 억새꾳, 피면서 흔들리어라
메마른 억새꾳, 지면서 흔들리어라
어머니 묻힌 산기슭을 돌아 내려오노라면
달은 무서리에 더욱 푸르러지고
바람은 무서리에 더욱 거칠어 지나니
내 너를 위해 한 방울의 피를 뿌려라
하늘이 무너질 때마다 두 눈을 감았다 뜨리라
운명보다 진한 만남으로 나는 또 피었다 진다
♧ 억새 - 정윤목
키 높이
부드러이 기다려
마른 몸 세워
하늘 향해
가슴 내보이는
오래 된 꿈의 씨앗
살그머니 열어
허공으로 부르는
오래된 나눔
두둥실
멀리서도 닿을 것 같은
오, 그 떨림
♧ 억새 - 청하 권대욱
익숙하지 않은 길
홀로 창공을 헤맨다
섣달 초사흗날부터
놋쇠소리 내는
날 선 바람에도 굴복 않았던 육신이
삭막한 벌판에서
풀어헤친 오지랖은
낯선 계절의 여백을 버티고 있다
말없이 만들어준 메마른 세상 속
수줍은 온기라도 더하면
창백한 숨소리 고르는 나는
유연한 생존을 체험하고 있다
광야의 길 복판에 선
너처럼.
♧ 억새꽃 - 제산 김대식
누가 억새라고 이름 붙였나?
이렇게 부드럽고 솜 같은 꽃을
이렇게 눈이 부시도록 희고 고운 것을
비단처럼 곱고 윤기 흐르는 그 꽃을
억새는 그랬지
억세게도 살아왔지
그렇게 굳건히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세파와도 타협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굳건하게 살아왔지
그렇게 억세다고 흉을 보아도
누가 그랬던가?
순간순간이 모여 영원이 된다고
한순간 한순간을 알차고 보람되게 산다면
영원히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억새처럼 희고 부드러운 꽃도
피지 않을까?
♧ 억새 사이로 - 이선명
바람처럼 슬프게 웃는다
흔들리는 지난날의 열정
언제나 자유롭고 싶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선명한 흔적이고 싶었다
바람은 한 길로
억새는 수십 갈래로 흔들린다
꿈은 현실이지 못해 더 애틋한가
삶을 기억하고 기다림을 배운다
바람처럼 슬프게 웃는다
♧ 가을 억새밭 - 윤홍조
저토록 아름다운 물결을 보았는가 굽이치며 흘러가는 물줄기를 보았는가
굽이굽이 산자란 굴헝을 넘어 유유자적 길 떠나는 뒷모습
내를 이루어 흘러가는 물줄기를 보았는가
분분한 세상 소리 소문 없이 바람의 발길 따라 몸을 사루는
속 살결 부드러운 물줄기를 보았는가
이부자락 펼친 듯 세상을 감싸며 넘실거려 흘러가는 비단필의 물결
몸짓 황홀한 물줄기를 보았는가
수많은 발길 환호하며 달려와 호소해 갈구하는 사랑 둬 두고
기뻐 흘러가는 물줄기를 보았는가
저 가을 억새밭을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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