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주홍서나물의 가을

김창집 2012. 10. 29. 11:48

 

 

요즘 산과 들로 나서서 나무와 풀을 살피다 보면

이들에게서도 세계화의 추세를 느낀다.

어렸을 적에 전혀 대해보지 않았던 나무와 풀이

맹렬한 기세로 우리 산야를 점령하려드는

귀화식물들이 너무 많다.

 

이 주홍서나물이 그 중 하나이다.

아프리카 원산의 한해살이풀이며,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자생하는 ‘주홍서나물’

1984년 경남 남해 상주해수욕장의 바닷가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처음엔 큰망초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발견된 곳에서 ‘남해붉은서나물’이라고 하다

고개 숙여 수줍게 주홍빛을 띤 걸 보고

주홍서나물로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것은 10월초 성불오름에서 찍은 것이 대부분인데

오름 가는 길은 물론, 빈터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 10월엔 마지막 가을의 눈물을 쓰리 - (宵火)고은영

 

풋내가 사라진 10월

붉어진다

불거진다

군살을 빼던 잎새들이 붉어진다

살아있는 모든 가슴이 불거진다

돌출 형 햇살의 빗금은

호랑가시나무처럼 뾰족한 가시로

균형을 깨트리는 맛에 신들렸다

가끔 균형이 깨진

농익은 아픔을 적어 놓은 페이지

바람이 틈새에 숨어든 음색들

노랑 빨강 갈색조의 주홍빛 발열

10월엔 마냥 그리운 고향에 편지를 쓰리

아울 한 가을이 저만치 보랏빛으로 멀어져 가는

마지막 가을, 황홀한 눈물을 쓰리   

 

 

♧ 주홍색 글씨 - 장수남

 

잎 새가 그리는 주홍색 글씨는

계절의 유혹

시월이 가면 누가 그려줄까. 하얗게 색칠할까.

 

사립문 살짝 제쳐놓고

어서 와요. 라는

잎 새 바람이 쓰는 구월의 서툰 글씨가

주홍색 단풍잎 산자락 발갛게 태우고 있었네.

 

소박한 산울림 부르는 소리도

이젠 먼 이야기가 될 거야.

목멘 그리움 이별의 전주곡은 메아리치겠지.

헤어짐을 아는 성숙한 계절

 

돌아올 수 없는 먼 강

낙엽은 외로워 벌써 지쳐있었네.

고민하고 사랑할 수 없는 시월 너는 떠나겠지.

나는 기다리지 않을 거야.   

 

 

♧ 작은주홍부전나비 - 한도훈

 

지리산 남원 준령을 넘다가

버스 차창 안으로

작은주홍부전나비 한 마리

세상 짐을 모두 벗어던진 채

할랑할랑 날아 들어와

두메꽃 꽃술 찾는 양

앞자리 여인의 머리에 가만히 앉았네

저도 버스 승객인 양

작은 나래를 팔랑거리더니

호랑나비 머리핀으로

봉긋 비끌어 맨 여인의 머리칼을

견우직녀달에 만개한

엉겅퀴쯤으로 알았는지

긴 더듬이로 더듬기 시작했네

버스 차창에 비친

여인의 눈동자엔

퍼렇게 멍든 이슬이 맺혀 있고

지리산 산등성이에선

서로 질새라

산메아리 들메아리 새끼 친

아빠 뻐꾸기들 울음소리

그제서야 내 눈은

작은주홍부전나비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

휘뚜루마뚜루

천변만화(千變萬化) 세상을 보았네

      

 

♧ 주홍글자 - 김낙필

 

잠든 새벽 누군가 문을 두드렸을 때

화들짝 놀라

문고리를 잡고 안간힘을 쓴다.

돌아서는 소리에 가만히 문을 열고

동구 밖으로 몰려가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천리길 돌아 찾아온 그는

집으로 결코 돌아가지 못한다.

어느 산모퉁이에서

젖은 채

길목을 지키고 있으리라.

 

이치에 밝지 못한 사람의 행로란

항상 그러해서

용기가 부족해 겉돌고

도덕적 윤리가 애물처럼 버겁다.

하나를 버려야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다는 섭리에 진저리치며

빈 밤을 꼬박 새운다.

 

초막을 털고 떠나는 방랑은

걸어온 길 끝에서 다시 몸을 틀고

해를 쫒다보면 저무는 날도 없어

벌써 세상을 몇 바퀴째 돌았는지 알 수가 없다.

네발로 걸어도 흔들리는 땅

뒤꿈치로 따라오는 그리움의 무게들로

세상가운데 드러눕는다.

 

소매자락을 잡는 유혹으로

무서운 시험 안에 갈기처럼 찢기는

편린片鱗..

 

살려달라고 외치지 못해

주홍글자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런

나다...   

 

 

♧ 주홍글씨 - 김민소

 

너로 인해

가슴에도

고랑이 생기는 걸 알았지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어도

터뜨릴 수 없는 꽃망울은

너무 많은 눈물을 먹었던게야

 

운명이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거든

 

만난 것이 그렇고

많이 사랑한 것이 그렇고

잊어야 하는 것이 그렇고 말야

 

그것이

사랑을 한 죄거든   

 

 

♧ 주홍빛 커피를 마시며 - 김명희(惠園)

 

그날 오후

찻잔 속에 잠기던 얼굴들

다시 살아나고

 

흘려버린 이야기의 조각들은

커피향에 젖어

시가 되고

나무가 되어

줄을 잇는다.

 

한 구절의 언어마다

그 속에 이끼처럼 피어나는

뇌실의 꽃들

너 만을 위해 작은 열매 하나

매달린다   

 

 

♧ 그대 카메라 앞에서 5 - 정웅

   -그리움보살

 

그대 앞에 서면

나는 그리움으로 휘청댑니다

그대가 한 발짝 다가 올 때 마다

어쩌면 기다림으로 전율합니다

잡힐 듯 손을 건네지만 닿지 않는

정작, 머물 수 없는 간절한 거리

 

차라리 눈을 감으면 더 잘 떠오르는

가늠할 수 없는 그리움은 아픔입니다

웃는가 싶은, 그 그리움이 모질고

우는가 싶은, 그 그리움이 독하고

그 그리움은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

 

그대는 눈치 채지 않았나요?

내가 환영으로 몸살하고 있음을

내가 그리움을 앓고 있음을

더 이상 무엇을 확인하려구요?

셔터를 누르세요

자, 어서요

 

빛. 그리움. 그리고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목매 죽은 순이 엄마도 보았답니다

미처 날뛰던, 끝내

바람이 된 순이도 보았구요

그대, 나무그리움보살   

 

 

♧ 고향을 꿈꾸며 - 목필균

 

고추밭에 머문 햇살이

붉게 물들어가고

빈집 장독에 부서지는 햇살에

꼬리를 감추는 시월

 

스무 살 청춘부터

오육십 년 함께 늙은 노부부가 떠난

진흙마당에 사기요강이

모란꽃 안고 엎어져 있는데

 

도시에서 하얗게 바랜

무딘 시선이

양평군 지평면 망미리

빈집에 머무르며

푸른 고향을 꿈꾸고 있다

 

앞마당 채마밭에 노년이

꽃무늬 몸빼바지 입고

호미질 하는데

 

돌담 넘어선 감나무에

주홍빛 노을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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