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산국이 제철입니다

김창집 2012. 11. 2. 00:12

 

11월이 되어 하늘이 차가워지면

노란 산국이 피어난다.

애월읍 중산간에 취재할 일이 있어

몇 번이고 찾아다니는데

곳곳마다 산국이 피어

나를 유혹한다.

향기도 그렇고 자태도 소박하고

깊은 겨울까지

어떤 곳에선 내년까지 피어

제주의 오름을 장식할 것이다.

 

 

산국(山菊)은 국화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60~90cm 정도이며 몸 전체에 흰털이 나 있다.

잎은 어긋나며 가장자리가 갈라지고 톱니가 있다.

9~10월에 노란색 꽃이 핀다. 어린잎은 식용하며

꽃은 약용된다. 산과 들에 나는데,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 - 임태주

 

가을해가 풀썩 떨어집니다

꽃살 무늬 방문이 해 그림자에 갇힙니다

몇 줄 편지를 쓰다 지우고 여자는

돌아앉아 다시 뜨개질을 합니다

담장 기와 위에 핀 바위솔꽃이

설핏설핏 여자의 눈을 밟고 지나갑니다

뒤란의 머위잎 몇 장을 오래 앉아 뜯습니다

희미한 초생달이 돋습니다

봉숭아 꽃물이 남아 있는 손톱 끝에서

詩는 사랑하는 일보다 더 외로운 일이라는데……

억새를 흔들고 바람이 지나갑니다

여자는 잔별들 사이로 燈을 꽂습니다

가지런히 빗질을 하고

一生의 거울 속에서 여자는

그림자로 남아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씁니다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지웁니다   

 

 

♧ 산국차를 대접받았다 - 이희숙

 

어쩌자는 작정도 없이

바람처럼 들른 곳에서

산국차를 대접받았다

생각 없이 마셨는데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건

단순한 물 한잔이 아니었다

쌉싸름한 향기가 목젖을 울리는 순간

그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산국을 뜯어 차로 만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정작 차 한 잔을 비우는 동안

내 자신이 추억이 되고 있었다

산국차를 대접받았다

바람처럼 갔다가 꿈처럼 다녀온 곳에서  

 

 

♧ 새와 나와 저 산 그 어느 강 너머의 산국 - 박남준

 

오랜 죽음의 병을 앓는 이의 다리를

만져보았는가 새,

지상을 박차고 내 이 무거운 하늘을 푸르릉,

날아오르는 새, 뼈만 남은 새다리 같던 사람

그 어디에서 새는 불쑥 걸어나와 겹쳐지며

날갯짓을 해댔을까 이제 다시 그이는

두 발을 딛고 햇빛 속으로 살아

나갈 수 없는데 아 그때

푸른 소나무 숲에서 일어난 불꽃들이 화르릉

소리 지르며 타오르던 새의 장엄한 비상

태양의 하늘 어디에는 바람을 타고 자유로울

그의 새가 있겠으나

 

 

밤이 깊다 나 아직 이 산 속에 남아 있다

창백하게 푸르도록 그믐달이,

시리다 그 시린 달이 감나무 가지

그래 꼭 그 새다리처럼 앙상한 감나무 가지

이제 잎새들 하나 남아 있지 않는

이 가을나무 끝에 위태로이 흔들리며 뒷산

모악의 검은 산능선에 잠겨 쓰러져가는데

저 산 그 어느 강 너머

너는 있겠다 산국 같은 향기로 피어난

네가 있겠다.   

 

 

♧ 치악산 산국 - 소양 김길자

 

소슬바람 노래지는 낙엽송 아래

간들간들 한 그녀가

고독의 끝자락 붙잡고

온 천지에 삶의 향기 보낸다

낙엽 된 실낱같은 희망 하나

발 시려 오들오들 떨면서도

바람막이도 없이 두 손 비비며

발이 쥐나도록 서있을까

얼마나 보고 싶고 아득했으면

물안개 피한 산허리에서

길섶까지 내려와

이토록 시린 하늘 바라보며 기다릴까

낙엽송 위에서 가을 내려오면

아침마다 마시던 이슬 서리꽃이 필 텐데

그리움 허기지기 전

산국화야 길 서둘러야겠다.   

 

 

♧ 풍경화 - 박종영

 

어지러운 발끝에 채이는 새벽바람은 언제나 차다

상강 지나 늦가을로 접어서는 더욱 그렇다

 

몇 개 안 남은 나뭇잎이

맨땅을 업고 뒹굴 때마다

땅으로 숨어드는 고요,

어두워지는 슬픔의 소리가 보챈다

 

나는 오늘도 숲을 닮으려 산을 오르고,

떠나는 절기 달래며 익숙한 그늘에 마음을 심는다

잠시 산자락에 앉아 바라보는 지평 끝으로

산은 강이 되어 흐르고,

 

슬퍼지기 위해 늑장 부린 산국 한 무리

망설이며, 가는허리 흔들어 주라 아양이다

 

게으른 석양으로 온기 돋우는 자작나무 숲

작달한 나무 사이로 설익은 산 다래 몇 개,

속살 환하게 발가벗으면

산 까치 볼록한 가슴 훔쳐 날고,

 

불현듯, 산 넘어 나의 가을은,

천년, 그 묵언의 세월을 어이 혼자 지키는가   

 

 

♧ 바람의 탑 - 목필균

 

가만히 들여다보면

도선사 목탁소리 가랑가랑 들린다

 

북한산 기슭

비척거리는 발걸음도 외면한

잡풀 무성한 암자 터

 

산국 몇 포기

기댈 곳 없는 마른 풀숲에 머물러

바람의 탑을 쌓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비구니의 뻐꾸기 우는 사연을

간직했는지

 

만 가지 근심 버리고

만 가지 욕심 버리고

산 속으로 숨어든 사연도

허망한 바람이려니

그렇게 휘돌아 스쳐가려니

 

암송하다만 천수경이

오동나무 마른 가지에 걸린 채

떨어지는 낙엽 헤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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