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11월호와 단풍

김창집 2012. 11. 6. 01:01

 

  우리詩 11월호(통권 293호)가 나왔다. 우리詩 칼럼은 장수철의 ‘시와 음악’, 신작시 28인선은 임보 정순영 김동호 이산하 김두환 김판용 김찬옥 최정남 박정원 한옥순 장승진 이상호 장혜승 나기창 최서진 고미숙 김경선 김세형 한춘화 황연진 박승출 이강하 김봉구 안이삭 정재춘 황봉학 김정 정동재의 시 2편씩을, 우리詩 논단은 조병기의 ‘천상병의 시세계’, 서평은 박완호의 문숙 시집 ‘기울어짐에 대하여’를 썼다.

 

  ‘내가 읽은 시 한 편’은 박동남이 홍해리의 ‘아름다운 남루’, 조삼현이 신현락의 ‘소금사막’, 이환이 유홍준의 ‘혈서’, 김금용이 김연종의 ‘죽음 또는 주검에 관한 어떤 기록 - 사체 검안서 쓰는 날’을, 신작 집중 조명은 (1) 윤범모 편 ‘영혼의 무게’ 외 4편 - 해설 공광규, (2) 장성호 편 ‘이방인 시편 - 몰락하는 자’ 외 4편과 시인의 말, 시안으로 읽는 우리 문화는 박상미가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시가 있는 수필은 황정산의 ‘색깔과 냄새’를 실었다.

 

  지난 일요일 한라산 기슭에 있는 생태숲을 통하여 샛개오리로로부터 거친오름까지 가는데, 태풍에 지다 남은 단풍이 요 정도로 물들었다. 비가 와서 사진이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카메라에 빗방울이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어렵게 찍은 것이기에 우선 시 8편을 뽑아 같이 내보낸다. 

  

 

♧ 시 -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니야,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지만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 길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가 건드리더군  

 

 

♧ 진퇴양난 - 임보

 

선거에 뛰어든 무모한 아들을 두고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저놈이 안 되면 집안이 망하고

저놈이 되면 나라가 망하고…  

 

 

♧ 가을의 기도 - 정순영

 

가을에는

더 간절하게

기도하게 하소서.

 

나의 모두가

가장 낮게 엎드려

감사하게 하소서.

 

싱그러운 나뭇잎으로 하늘을 가리던

부끄러운 시간을

지우고

발가벗은 나뭇가지를 맴돌며

울음 우는 바람자락도

구원으로 거두게 하소서.

 

그리하여

온갖 것을 사랑하여

감사하는

기도의 촛불이게 하소서.

 

가을에는

맑고 고요한 불꽃의 한가운데서

더 간절하게

기도하게 하소서.  

 

 

♧ 삼천궁녀 거느린 왕 - 김동호

 

삼천궁녀 거느린 왕

한 번도 수박 속

먹어보지 못했다

 

수박껍질만 많이 많이

드시다 갔다

 

상궁 내시가

낄낄대며 전하는 말  

 

 

♧ 강 - 이산하

 

모난 돌과 바위에

부딪쳐 다치는 것보다

같은 물에 생채기

나는 게 더 두려워

강물은 저렇게

돌고 도는 것이다.

 

바다에 처음 닿는

강물의 속살처럼 긴장하며

나는 그토록

아프고 아픈 것이다.  

 

 

♧ 바람소리 - 장혜승

 

전깃줄을 마구 흔들어

기어이 울리는 저 처절한 울음소리

그 소리를 끌어안고 끈질기게 울고 있는 저 여자

얼마나 그리웠으면 저 울음소리 낼까

쉬었다가 풀리고

잠겼다가 열리는 저 가녀린 울대

삼동의 밤이 꼬리를 끊고

나의 이중창문에 머리를 찧고 들어

명치끝에 못을 친다

등허리로 못 끝이 삐져나와도

망치질 그치지 않는다

숨이 막히도록 아프다  

 

 

♧ 한때 흐리고 비 - 김세형

 

그 여자가 내게로 온다고 했다

그래서 올 때라 했다

그 여자는 사랑이라고 했다

난 구름이라고 했다

 

그 여자가 내게서 간다고 했다

그래서 갈 때라 했다

그 여자는 이별이라고 했다

난 바람이라고 했다

 

그 여자가 울며 간다고 했다

그래서 울 때라 했다

그 여자는 눈물이라 했다

난 비라고 했다  

 

 

♧ 흰 뼈를 만나 - 황연진

 

네 발 밟고 싶다

뼈마디 꼭꼭 밟아주고 싶다

갈 수 있다면

마디마디 디뎌서 네게 가고 싶다

땅에 누운 턱 아래 그늘까지

웃음이 피어있겠지

귓속으로 흘러든 이야기 듣고 싶다

너를 비껴간 시간과 그 이후를 이어

넓게 펼치고 싶다

똑바로 뜨지 못한 눈

초점이 잡히지 않아 공중에 흘러 다닌 눈

눈과 눈 사이 그 간격이 삶이었다

그 거리가 멀미나게 길어서

쓰러져 눕곤 했다

 

날마다 깊이 잠든 적도 없다

너와 갈라진 자리 쪼개어진 금을 이어

가시그물을 뜨곤 했지

아무리 멀리 던져도

네 머리칼 한 올 건질 수 없었다

빛바래 사라지는 그 끝에 가고 싶다

 

네 몸 만나 꼭꼭 밟다가 보면

만날 수 있겠지 머리꼭지에라도 닿을 수 있겠지

네 발가락 밟고 싶다

하나씩 밟아 보이지 않는 너에게 가고 싶다

네 눈에 희미하게 내가 보이고 싶다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詩 11월호와 자주쓴풀  (0) 2012.11.10
우리詩 11월호와 물매화  (0) 2012.11.08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  (0) 2012.10.27
제주작가 가을호의 특집  (0) 2012.10.26
거리에 흐르는 가을의 詩  (0) 2012.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