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11월호와 물매화

김창집 2012. 11. 8. 00:13

 

올해는 시간이 없어 오름 가는 기회가 적어졌다.

오름에 가더라도 마음의 여유를 갖고 차분히

사진 찍지 못하여 서둘르기 때문에 내용이 부실하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나

시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일 터.

쫓기면서 하는 일이 뭐 제대로 된 게 있겠는가?

 

부족한 대로 물매화 몇 장 골라

두 번째 우리詩 11월호의 시와 함께 내보낸다.

 

물매화는 범의귓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뿌리잎은 잎자루가 길고 원심형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원대에 달린 잎은 잎줄기가 없으며 원대를 감싼다.

꽃줄기는 길이 10~40cm 정도이고 털이 없으며

능선이 다소 있고 한 개의 잎과 한 개의 꽃이 달린다.

꽃은 7~8월에 백색으로 피고 지름 2~2.5cm 정도이다.

열매는 삭과이며 넓은 난형(卵形)이다. 주로 산지의

볕이 잘 드는 습지에서 자라며

북반구의 온대에서 아한대에 걸쳐서 분포한다.

 

 

♧ 거짓 사제 - 박승출

 

거짓 사제가 내 몸속에 피를 흘려 넣었다

산다는 건 우글거리는 벌레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는 동안 밤이 왔다

사는 동안 검은 비가 내렸다

사는 동안 검은 꽃이 피었다

사는 동안 아이들이 죽었다

비밀의 정원에서는 꽃들이 성장을 계속했다

거만한 사제들은 수명을 늘여갔다

유럽풍 샹들리에가 잇는 저택에서 나오지 않았고

모든 책들이 책장에서 낡아갔다  

 

 

♧ 위태로운 관객 - 안이삭

 

왼쪽으로 첫 번째 배우 등장

그는 짧은 순간 관객을 사로잡았다

잘생기고 훤칠한 키는 물론

첫 대사부터가 자신감에 차 있다

발음도 정확하다

‘후회하지 마십시오’

천천히 관객들 사이를 걸을 때

한 발짝도 주저하지 않는다

맡은 신이 끝나자 여유롭게 오른쪽으로 퇴장

잠깐의 암전

 

다시 왼쪽으로 두 번째 배우 등장

이 배우는

오늘이 첫 무대인지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에게는 너무나 길었을 대사

‘기회는 많지 않아요 한 번뿐입니다’

소품이 설명조로 주렁주렁 흔들린다

사내의 눈길과 상관없이

나는 흩어지는 잠을 붙든다

좁은 무대를 한 바퀴 돌아 오른쪽으로 퇴장

다시 잠깐의 암전

 

졸음에 겨운 관객을 깨우며

매너리즘에 젖은 중년 배우가 왼쪽으로 등장

(오늘은 어쩌자고 출연자가 이렇게 많은가)

긴 대사도 필요 없이

간결한 한마디로 자신의 배역을 정확히 전달한다

그는 노련했지만 열정은 없다

자신의 보수에 알맞은 연기가 어디까지인가를

오랜 경험으로 터득했을 것이다

‘지금! 당장! 꼭!’

대사는 강경했지만 관객의 열광을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다

관객도 부담 없이 편안하다

 

내 옆자리의 관객이 영등포역에서 내리고

새로운 관객이 들어와 앉고

스크린도어가 닫힌다

캄캄한 지하의 굴곡을 지나느라

매달린 손잡이들이 일제히 몸부림친다  

 

 

♧ 이장(移葬) - 정재춘

 

장모의 기일이 지나갔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늘 걱정이던 자식들

제 앞가림에,

항아리 속 에미는,

 

잊는 모양이다

 

철따라 뗏장 변해가는 황홀한 한 평 반 안방에서

남의 조상 위해 고수레 떼어놓은 갸륵한 정성을 보며

매년 열두 달 하염없이 기다렸던 눈 맑은 염원은

거기로 도로가 난다는,

여기로 지하철이 든다는,

흉흉한 소문들과 함께

새로 이사한,

이름표도 화사한,

가 열 1-B 15번 안방으로 배달되어 왔다

 

잘도 정리된 이 뼈들의 아파트에서 처음 할 일은

불에 그을려 없어진,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몸취 찾아가며

두리번거리지도 못하는 같은 처지의 이웃들을

기웃대는 일일게다

그것도 진력나면 물때 낀 멀건 면경에서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일게다

 

올라앉을 흙방석이 없는 지금

장모는 무슨 모양으로 이승의 끈을 잡고 있는 것일까

바람이 일러주고 맺힌 이슬이 전해주었던

사람의 일들은 제각기 흘러가고

기일에 받았던 넉넉한 경배가 사라진 지금,

일없이 들뜬 마음만 바빠

인심 후히 고수레 나누던 전설 같은 때를 추억하며

면경에 머리만 주억거리고 있다   

 

 

♧ 하늘을 보쌈하다 - 정동재

 

수차례 헹궈졌을 쌈들은 소금기에도 간간이

흙내를 풍기고 있다

누군가와 누군가의 체온 감싸다 보면

향토 내 짙은 넉넉한 쌈이 되는가

다시 수육 한 조각 싸맨 보쌈 덥석 입에 넣고 우리는 오늘

내일을 쌈하려 든다

조약돌처럼 매끈한 감 씨는 지난가을 가지 끝 홍조에

터질 듯 터질 듯 곱게 싸여 있고

현무암 결 복사꽃 폭발 어김없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 과수댁들 꽃구경은 온데간데없고

눈만 뜨면 하늘 타령이다

하늘이 낸 제왕의 별을 치마폭에 감싸 안은 대조영의 어머니

별이 떨어졌다는 관악산 낙성대 치맛자락은

강감찬 장군 동상을 아직도 감싸 안고 있다

요즘 세상은 넋 빠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온몸으로 매일 밤 당신을 보쌈한다

죽어도 변하지 않는 체온이 있으므로 늘 화점이 되므로

이 봄, 여전히 꽃봉오리 싸고 돈다

자고 일어나면 한가득 해온 보쌈 떡하니 풀어놓는다   

 

 

♧ 한낮의 별빛 - 천상병

   --새

 

돌담 가까이

창가에 흰 빨래들

지붕 가까이

애기처럼 고이 잠든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슬픔 옆에서

지겨운 기다림

사랑의 몸짓 옆에서

맴도는 저 세상 같은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물결 위에서

바윗덩이 위에서

사막 위에서

극으로 달리는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새는

온갖 한낮의 별빛계곡을 횡단하면서

울고 있다.   

 

 

♧ 아름다운 남루 - 홍해리

 

잘 썩은 진흙이 연꽃을 피워 올리듯

산수유나무의 남루가

저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깔을 솟구치게 한

힘이었구나!

누더기 누더기 걸친 말라빠진 사지마다

하늘 가까운 곳에서부터

잘잘잘 피어나는 꽃숭어리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소리

노랗게 환청으로 들리는 봄날

보랏빛 빨간 열매들

늙은 어머니 젖꼭지처럼, 아직도

달랑, 침묵으로 매달려 있는

거대한 시멘트 아파트 화단

초라한 누옥 한 채

쓰러질 듯 서 있다.

 

이 막막한 봄날

누덕누덕 기운 남루가 아름답다.   

 

 

♧ 소금사막 - 신현락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3만 5천년의 시간은 화석이 모래로 전이하는 데 충분한 풍량이어서 학자들이 사막의 발원지를 추정하는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밤마다 모래가 바다에 빠져 죽은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3만 5천년 후, 그 자리는 소금사막의 발원지가 되었다

 

  모래의 여자는 정갈한 소금으로 밥상을 차리고 바람을 기다린다 사막에서 바람을 많이 먹은 종들은 종종 변이를 일으키는데 그들이 사랑을 할 때는 서로의 입안에 소금을 조금씩 흘려보낸다 사랑을 구하기 위해서 남자들이 여자를 찾아오는 건 소금에 중독된 까닭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래의 동선을 보면 최초의 호모사피엔스가 여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바람의 혀는 감미롭게 모래의 능선을 애무하지만 모래의 여자는 모래만 낳을 뿐이어서 몇 만 년 동안 처녀의 지평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바람이 없는 날에는 가끔 소금이불을 햇빛에 펼쳐놓기도 한다

 

 

  지금도 소금에 중독된 남자들이 모래의 여자를 찾아 간다 그러나 소금을 맛본 바람에게 혀를 내맡기다가 대륙을 이동하는 모래의 변종에게 눈을 다치기도 한다 눈 먼 사내들이 사막에서 길을 잃을 때 모래의 여자는 심해의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싱싱한 소금을 그들 앞에 뿌려준다 그렇다고 소금을 한 주먹씩 집어 먹는 건 사막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무리 극소의 미량이라도 한 알의 소금으로 치사량에 이를 수 있다

 

  사랑을 많이 가진 남자의 입안을 들여다보면 소금바다가 출렁거린다 그들은 죽어서도 썩지 않는 사랑을 찾아 흰 뼈만 남은 몸으로 사막을 노 저어 간다 모래의 여자가 가시나무로 소금을 찍어 인간의 간을 맞추는 것은 이 세상으로 사막이 번져오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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