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낮은 제법 햇살이 따뜻하더니만
밤이 되어 날씨가 퍽 쌀쌀해졌다.
후목 소상호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달빛에 오르다’ 중
2장 달빛에 비친 그리움을 읽고
시를 몇 편 골라
요즘 한창 피어나는
흰애기동백과 같이 올린다.
♧ 낙엽
한동안 소식이 뜸하던 너
이렇게 급하게 다가온 사연
지난 장마 끝에 떠내려간 옆 가장이 때문에
아띠 잃은 상처가 너무 커
산자락에서 움츠려 파랗게 떨다
문득 선선한 바람으로 졸다 깬 장돌뱅이
새벽시장 마수걸이 하듯
문 두드리는 건 아닌지
발갛게 물든 벌레 먹은 손으로
악수 내미는 나그네 되어
인연을 끊으려고 고향에 등 돌려
온 몸을 맡기는 창녀처럼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구는 갈래하는 노숙자인가
그러다 울며불며 나릿물에 첨벙 뛰어 들어
원 없이 물마시고 토해내는 금붕어 되어
꼬리도 흔들지 못한 채
돛대 꺾인 배되어 떠내려 왔다
너울너울 개울물 따라 몸을 맡기며
다시 땅으로 올라오고파
뭍으로 뭍으로 헤엄쳐 오후가 되어야
새물내 나는 흙냄새 맡는구나
그래도 흙을 밟아야 고향 냄새 맡고
고향 돌아가는 길손에 나 여기 있으니
후년엔 내 탯줄자리 밟고 일어나 싹눈 틔워내는
고운 살붙이 되라고 전해 줄 수도 있지
너도 이제 집 떠난 아띠들과 꼭꼭 손잡아
모닥불 피워 구수한 낙엽 향수 맡고
취한 듯 누워 사위어 가거라
♧ 기억 속
고독이 눈멀어 혼자 있기 불편하다
먼 지방에서 날아온 택배
그 속에 웅크린 고향의 넋
그 맛으로 탕을 끓여
우려내 강으로 가고 싶다
강가에 앉은 물새의 울음소리와 깃털의 신비가
인간의 어리석음이 크게 보이게 한다
그러다 캐고 그러다 되뇌는 산물
연어처럼 긴 여행의 노고
고향의 깊은 애정을 거머쥐고
나누는 정에 겨운 외딴 기러기처럼
먼 길이지만 가깝게 여기고
훨훨 날아간다
기억의 무덤으로
그러나 그곳은 너무나 짜다
♧ 삼월
지나가는 바람에 귀를 대고
오는 발소리를 듣고 싶다
덮어진 얼음 속 도랑물소리 들으며
뛰어가고 가고 싶다
어제 남은 낮달은 하얀 분 바르고
은빛 가면을 쓰고
길섶 마른 풀잎 소리를 애잔하게 듣고 있다
그대 생각에 할 일을 잃고
만남의 설정을 갖고 가슴에 다가오는 봄
소리 녹여 내 북소리 울리고 싶다
춘심을 부르는 걸음마
저기 저곳에 휘장 치고
안겨 보고 싶어 한다
양지 바른 곳 춤추는 강아지 꼬리
먼 곳 구름을 걷어 들이고
지나는 바람결이 볼을 간지러워
불편한 심리를 편하게 한다
새봄이여
불러보고 만지고 싶다
푸석푸석 날아오는
향기가 그리워
♧ 사월의 낮잠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처음으로 나비가 찾아든다
나비가 오고 우윳빛 날개짓이 오면
방울방울 꽃이 핀다
부어오른 나뭇가지 위에 앉은 애기 새들의 무언의 지저귐
그 입모양을 보는 우리는 황홀하다 못해
따귀를 때리고 싶은 충동을 가진다
그 아래 노랑나비들은 줄줄이 띠를 두르고
꽉 찬 이웃으로 띠를 하니
그 먼 산에 발간 나비춤이 덩실 덩실 거리며
불을 밝힌 새악시의 꿈이 달아올라 눈꼬리가 치뜬다
처마 밑에 죽은 잎들의 생기가 파란 잎을 내밀고
돌 틈에 애기 잠을 잔 나물들이 고개를 내밀어
지나가는 아녀자를 부르니
삽살개 소리가 빙그르 돌며 컹컹거리는 소리를 내어
옛날 고향 늙은 개의 꼬리 짓을 보는 것 같다
소리 내지 않는 하늘 가르는 비행기 꼬리는
따라 다니다 다시 연못 속으로 풍덩 빠지고 만다
물속에 빠진 삽살개는 시원해서
그렇게 싫지 않는 표정이다
이제 낮잠을 자도, 될 만한 때가 되었다
노란 파란 하얀 발간색들의 잔치에 술 한 잔 걸치고
껄껄대며 웃어보자
♧ 눈발
가슴으로 뛰어드는 것이
급한지 어지럽게도 쫓아온다
사선을 그리는 바람의 정확성 때문에
쏠리는 너의 아픈 생의 빗선
누가 뭐래도 너는
아픔을 털려고 몸부림치는 빗살무늬 문양
하얀 성을 만드는 축재의 성질 치고는
너무나 맑고 고운 심성
아픔의 연속적인 나이로 인하여
체할 때처럼 토하는 하늘 목구멍의 고집
토하고 토하여 만든 하얀 성의 몸
성 넘어 먼 곳은 보이지 않지만
누가 뭐래도 너는
아픔의 연속성을 지닌 응어리의 토함
토하는 것이 후련하여 약도 들지 않고
도망가누나
♧ 삶이란
그렇게 모질게 불던 바람이
길가에 노오란 민들레 보고 웃는 것이다
호수 위 둥근 원을 그린 물벌레를 보지 못한 채
꺾은 나뭇가지로 두드리는 억지와
하늘을 병풍처럼 가린 늙은 햇볕에
머리를 구슬린 구름을 보면서
저 속에서 살겠다는 이상적인 고심의 흔적을 가지며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가면이 그것이다
희미한 등불을 살려 보려는 큰 눈이
먼 달그림자의 상처를 보고 울면서
내일의 해를 기다린다
어쩌면 검은 날 푸르름 속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앞으로 달리는 시냇가의 속삼임이
우리의 심장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암소 눈처럼 껌뻑검뻑거린다
♧ 바다의 꿈
가슴에 바다를 키우는 것은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싶어서 만은 아니다
다음의 인정을 호소하는
비둘기 한 마리 더 키우고 싶어서 일게다
힘의 텃세로 인하여
울 듯 말 듯 하는 어설픈 앞날의 넋에
나의 큰 바람개비를 돌리지 못하기에
현재의 실상이 오르막 길옆에서
두려움으로 있지 않겠는가
앞으로 가는 바람개비의 주름을
지지게 하는 달콤한 커피를 마시며
나래를 달고 가는 환한 창가에 앉아
내일을 볼 것이다
어두운 구름이 바다에 얹혀 있어도
사랑을 품은 바다는
결코 차갑지만은 아니하다
♧ 자화상
나는 구름 위에 솟은
정상이고 싶었다
들판 하나 품고도 바다가 그리워지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욕망이고 싶었다
지금은 작은 언덕의 무게만으로도
숨이 가빠지는 가을 들판에 머무는 바람인거지
어린 시절의 풍경이 되고 싶은 거지,
그래 나는 바라지 않는다
논두렁 끝에 외롭게 우는 개구리 울음과
그 속에 지나치는 바람들
때로는 성스러운 아내의 관습조차도 원하지 않는다
이제는 흘러온 구름들의 자화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닌
우산 들은 모습들의 욕망조차도 퇴근을 서두른다
달의 그림자보다 태양의 그림자가 될 것이라는
시간 속이나 바람의 넓이는
설사 나를 발갛게 속을 데우더라도
입 꼭 다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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