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12월호의 시와 사철나무

김창집 2012. 12. 15. 00:39

 

우리詩 12월호를 마저 읽었다.

 

공교롭게도 ‘신작 집중조명’과

우리詩문학상 신인상

하반기 당선작 발표 부분으로

모두 여성의 작품

5편씩이다.

 

그 중 2편씩을 골라

예쁘게 익은

사철나무 열매와 함께 올린다.  

 

 

♧ 겨울 나그네 - 한옥순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새 한 마리 담벼락 아래 옹그리고 있다

잠든 듯 미동도 않는 새의 등이 쓸쓸하다

 

초겨울 시멘트 바닥이 꽤 싸늘할 텐데

저 길만 건너면 낙엽더미가 있는데

하필이면 왜 여기에 누워있는지

 

하늘과 땅 사이에 벼락이 있다는 걸

세상과 세상 사이에 벼랑이 있다는 걸

길과 길 사이에 또 딴 길이 있다는 걸

새와 나 사이 적막함이 지날 때야 알았다   

 

 

♧ 겨울 새 - 한옥순

 

저렇게도 작디작은 것들이

저렇게도 희디흰 빛을 띤 것들이

한꺼번에 화르르 몰려와선

이 더러운 세속에 내려앉네

 

살아선 결코 돌아갈 수 없는

머나먼 먼 길을 날아와서는

보이지 않는 부리로 세상을 쪼고는

소리도 없이 사라져가네

 

도대체 어떤 새이기에

도대체 무슨 사연이기에

작고 차가운 몸 손에 닿기도 전에

하룻밤 꿈결 같이 사르르 녹아버리네

 

밤이 새도록 늙은 모과나무 아래를 환하게 하고는,  

 

 

♧ 밤꽃 - 최혜숙

 

아버지 얼굴에 술꽃이 피면 쥐코밥상은 마당을 날아다닌다

 

마당 가운데 처박힌 밥상은 모로 서서 울고

젊은 엄마는 모로 앉아서 운다

 

땅바닥에 쏟아진 하얀 쌀밥을 주워 담으며

흰 달빛처럼 엄마가 운다

 

밤꽃이 웬수야

밤나무를 없애 버려야지

 

엄마는 도끼를 들고 몇 번이나 밤나무 밑동을 찍었지만

늙은 밤나무엔 해마다 왕밤이 열렸다

 

밤꽃 사이로 둥글게 떠 있는 쌀밥 한 덩이

괜스레 헛배만 불렀다

 

 

 

♧ 12월 32일 - 최혜숙

   --다운 증후군의 아이 유나를 위하여

 

새의 날개는

어디든 갈 수 있는 푸른 여권

엄마를 기다리다 시간이 멈췄다

작은 머릿속에선 쉴 새 없이 새가 울었다

 

날마다 창밖을 내다보며 날개를 소망한다

 

새를 꺼낼 수만 있다면

옛집의 푸른 대문 위에 앉아

병든 엄마를 위해 노래 부를 수 있을 텐데

손바닥 위에 푸른 여권을 올려놓고

지나가는 바람을 부른다

바람은 가다가 자꾸 멈췄으므로

이카로스의 날개를 질투하기도 했다

오늘은

너의 작은 머릿속에서 새를 꺼내

푸른 하늘로 날려 보낸다

 

 

♧ 사랑스러운 고해성사 - 최혜란

 

  새벽 1시 30분경, 조바심 내던 입술이 칠흑 같은 마음을 맹렬히 덮었다. 말라 비틀어가던 장작 같은 몸에 불을 지폈지. 뺨 한 대 때리고 밀쳐낼 법도 한데, 왜 거부하지 않았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 사이 밤눈이 밝아진 우리는, 찰나를 참지 못하고 안달 난 새끼들처럼 몸을 비비며 배꼽을 스치고 전신을 물고 빨고 핥고, 난 귓불이 제일 맛있어 가슴에 얼굴 묻고 싶어 울지는 마 꿈꾸는 거야, 범속하고 노골적인 문장이 색색한 숨소리와 함께 낡고 축축한 장판 위를 범람한다. 시작은 호흡법부터 천천히, 퀵퀵 슬로우, 말라붙은 눈물 자국과 짭조름한 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면서? 그럼, 우리, 서로 세계가 맞닿았는데 몇 만 겹 다생의 인연이 이어져 비로소 이생에서 만나게 된 걸까. 유치한 질문에 폭군이라 응수했다. 수녀를 좋아하는 폭군. 웃기지마 겉돌지 마 만지지마 이제 그만해 부끄러워 깊이 파고들지 마 뼛속까지 빠듯하게 파묻어줘. 한 치 가감 없이 질 낮은 고백들. 혀는 다용도로 쓰인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곧 염문설이 터지고 기묘하게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 기류를 감지하고 사람들 냄새와 숨소리로 팽창된 밀실에서 콧잔등이 시큰해질 정도로 물고 빨고, 사랑한다는 무책임한 말은 내 것이 아니기에 너의 침과 함께 삼켰지.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같은 옷을 입고 열 평도 채 안 되는 좁은 방에 모였다. 출신지는 알 수 없어, 스펙 따위, 내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잖아. 학벌, 배경, 나이, 성별, 다 알 게 뭐야.

 

  허무, 공허, 가난, 권태, 결핍, 무기력.. 비슷한 동기여서 식상하지만, 그래서 어지러움과 구토를 동반한 소화불량처럼 속이 다 미식거리지만, 그게 전부였다. 신선하긴 했어. 외로운 사람이 이리도 많나, 신기했거든.

 

  시계추는 느리게 가고 시간은 무서울 만치 빠르게 가고 하루가 다르게 지겨워지고 아침은 다시 오고 눈 감으면 지옥이 펼쳐져 상상의 늪으로 겁 없이 움푹 빠지지만 가지런한 입술은 달디 단 포상이고 풍만한 골짜기는 파묻기 좋은 무덤이더라. 귓가를 맴도는 목소리, 발끝을 모으던 밤들, 꿈결보다 부드럽고 나뭇결보다 정직한 살결,

 

  정착할 수 없으니까 늘 짐을 쌌을지도 몰라. 유목민처럼 이 세계, 저 세계 방랑하며 곁에 두고도 외롭다고 진저리나게 어리광 부렸으니 질릴 만도 했다.

 

  끝까지 가본 적 없으니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지. 캐리어에 수백 번 짐을 싸고 풀고, 네 뺨을 수십 번도 더 깨문 후, 결심했다. 떠나야겠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어. 타국으로 가라고. 책임도, 의무도 회피하지 않는 눈, 바라보면 침묵, 또 침묵. 그저 죄의식 뿐. 그 대가로 영원히 회개하며 살겠다.

 

  어디로 가냐고 묻지 않았지. 하긴 이제 와서 무슨 말이 필요할까. 속죄도 지치고 말뿐인 알량한 새벽이다. 가소로운 삶이다. 그녀는 성인이었다. 나는 한낱 범부였다. 더 이상 달콤한 허밍으로 마스터베이션하진 않겠지. 조금 더 처박아보란 말이야. 가장 높은 탑에서 소리 지를 수 있도록.  

 

 

♧ 길 위의 이방인 - 최혜란

 

처음으로 되돌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모른 척하며 힘겹게 내민 손을 재고 또 재보다가 뿌리쳤다.

날숨-들숨을 천천히 뱉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싶었기에

아무 것도 모르는 백치마냥 염치없이 손을 내밀었다.

 

사람들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갈 때 마다

그가 내민 구슬 아이스크림이 연상된다.

오색 구슬 아이스크림을 조심스레 움켜쥐고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시간들.

누구에게도 부끄러움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혀를 위로 말아 올리던 순간들.

약자라도 되는 듯 털썩 주저앉아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한바탕 울음을 퍼붓던 나날들.

 

어느 날인가, 꿈에선가, 낯선 모스크 사원에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실 나는, 타인의 인생을 훔쳐보는 관음증 환자이고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주의 은밀함을 엿보려는 욕망으로 뒤덮인 회색빛 아스팔트인데

까치발 세우고 목이 터져라 신神을 외치다보니,

 

만신滿身이 타이어 자국이다.

행인들의 자박한 발걸음과 침, 휴지조각 따위가 몸에 남아있다.

 

오늘은 햇빛의 침입조차 버겁다.

구태여, 반복하고 싶지 않지만 다시 한 번 라디오의 리플레이 버튼을 함부로, 꾹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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