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진하시집 ‘아내의 시’와 자목련

김창집 2013. 5. 10. 12:12

 

진하의 제2시집

‘아내의 시’가 나왔다.

 

진하는

196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와

대학원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 ‘녹색평론’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산정의 나무’가 있다.

 

마음에 든 시

여덟 편을 골라

자목련과 함께 싣는다. 

 

 

♧ 시인의 말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노래다.

그래서 불온하다.

추방되기 쉽다.

 

그러면 아주 통속적으로

일상적인 것에 대한 노래는?

 

시인이 천상에서 노닐 때

시인의 아내는 밥상을 차린다.

 

2012년 3월

진하  

 

 

♧ 아이를 보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서너 살까지의 추억은

부모님의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가 가진

내가 모르는 나의 기억은

어떤 나의 삶일까.

 

시원의 언어를 웅얼거리며 기어오는

딸아이 얼굴 속에 비치는

아버지의 눈길.

 

끝내 기억해내지 못할

내 아이의 가장 천진한 시간들을

내가 훔치며 산다.  

 

 

♧ 구름

   - 어린 시인 1

 

늦게 얻은 딸아이 눈엔

아빠의 새치가 심상치 않다.

어느 날은 수건을 들고 훔쳐대더니

오늘은 이렇게 재잘거린다.

아빠 머리가 하얗다!

왜 일허게 됐을까?

구름에 머리를 감았나?  

 

 

♧ 아내의 새치

 

아내의 흰머리를 보았다.

우연이 아닌 가닥들이

지난 날 내 과오의 흔적처럼

검은 머릿결 속에 숨어있다.

아직 너무 이른 나이 아닌가.

무언가에 들키듯 마음이 저렸다.

그냥 모른 척 덮어둘까 하다가

말없이 몇 개를 뽑아주었다.

아내는 아프다는 말이 없다.  

 

 

♧ 시인의 아내 - 진하

 

참 좋으시겠어요

늘 시가 있어서

시인과 함께 살아서

항상 시를 읽어줘서

시처럼 살아서

 

쌀독은 비어가고

한 벌 옷도 헐고

책 곰팡이는 퍼지고

먼 길도 걸어가고

말수는 줄고

술병은 늘고

 

참 좋으시겠어요

시인과 함께 살아서

세월은 한순간

생활은 희미하고

시는 안 팔리고

시인은 단명하고

 

참 좋으시겠어요

그대의 고난이 내겐 작은 위로

그대의 패배는 나의 승리

저보고 그렇게 살라고요?

무슨 말씀이세요! 

 

 

♧ 조랑말 타고

 

  졸리운 낮엔 조랑말을 탄다. 어린 시절 탔던 조랑말이 한낮 꿈속에서 안장도 없이 나를 태운다. 동트는 아침 이슬 걷은 바람 맞으며 학교 가던 길, 고부니마루 너머 오름들이 점점이 고개 들고 일출봉 하늘 위에 걸린 해. 물마루 너머로 아청빛 섬이 하나 보였다 사라졌다 한다. 할머니는 저승길이 언뜻언뜻 보인다고 했다. 말 모르는 짐승 타고 흔들리며 가는 길, 전설이 배인 굽은 말 잔등에 올라 아득히 울리는 방울소리 들어보자. 종달새 한 마리 자꾸만 공중으로 솟구치는 아침, 조랑말 타고 고개를 넘어가자. 학교 지나 멀리 은빛 바다 풍경까지 이어도 가자. 이어 싸나 이어 싸나 이어도 가자.

 

 

♧ 멜순

 

섬을 나온 지 스무 해

섬은 홀로 외롭다

폭풍우가 지나가도 어느새

덤덤히 깨어나는 바다

 

별 고른 들녘 가장자리에

고사리 솟아오르는 봄날

그대 다시 고향에 갈 수 있을까?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멜순국이 먹고 싶다

 

 

♧ 오름

 

저건 대지의 상처다

아니다 저건 성난 화산이다

아니다 저건 희망의 봉우리다

아니다 저건 부풀어 오른 종양이다

아니다 저건 반역의 봉기다

아니다 저건 쓰러진 주검들이다

아니다 저건 쓸쓸한 섬이다

아니다 저건 처녀의 젖무덤이다

아니다 저건 설문대할마님의 똥덩이다

아니다 저건 일만팔천 신들이 집이다

아니다 저건 한라산의 새끼들이다

아니다 저건 우주의 씨앗이다

아니다 저건 마을을 낳는 모태다

아니다 저건 마을이 낳은 형제들이다

아니 대지 모신의 젖꼭지다   

 

 

♧ 한라산 1

 

제주는 가도 가도 한라산이다

남쪽 푸른 바다 멀리

섬 하나 산 하나

작은 섬이 큰 산 낳고

큰 산이 새끼 섬 기르는

제주는 어딜 봐도 한라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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