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 6월호를 다시 펼친다.
저번에 읽었던 곳이 접혀 있어
다시 읽다가 시 몇 편을 골라
이웃 골목에 흐드러지게 핀
멀구슬나무 꽃과 같이 올린다.
멀구슬나무는
멀구슬나뭇과에 속한 낙엽 교목으로
잎은 깃꼴 겹잎이고 어긋나며,
5~6월에 자줏빛 꽃이 잎겨드랑이에 원추 꽃차례로 달린다.
열매는 9월에 황색으로 익는다.
정원수로 심으며 열매는 약재로 쓰이며
우리나라, 일본, 타이완 등지에 분포한다.
♧ 시계가 죽었다 - 이생진
시계는 시간을 챙기지 못하면 죽고
나는 밥을 챙기지 못하면 죽는다
헌데
시계의 밥은 내가 챙겨 주지만
시계는 내 밥을 챙겨 주지 않는다
서로 공생共生하는 척하면서
서로는 공전空轉이다
나는 시계가 없으면 갑갑한데
시계는 나 없이도 간다
나는 시계에 밥을 준다
오늘 죽은 시계에게 새로 산 건전지를 줬더니
시계가 간다
무도장에 나온 무희처럼 신나게 간다
시계는 건전지를 먹고
나는 밥을 먹고
시계는 바늘로 가고
나는 발로 가고
벽에 걸린 시계에 건전지를 갈아 줬더니
신나게 간다
죽은 내 발에 새로 산 신발을 신겨 주면
나도 저렇게 걸어갈까
내가 죽은 뒤에도 시계는 간다
건전지가 살았으니까
건전지가 죽으면 시계도 죽는다
生死는 건전지에 있다
하지만 건전지는 혼자 가지 못한다
시계가 죽었다!
실은 건전지가 죽었는데
시계가 죽은 척 한다
♧ 여행길 - 현택훈
터번을 쓴 남자의 이름은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븐 압둘라 무함마드 븐 이브라힘 알 라와티
짧게는 이븐바투타
손가락으로 창문을 여닫는 관악기의 이름은
처마 아래 볼 빨간 아이가 호호 불면 분홍색 바람 꽃잎 골목길 가득 흩날리는 악기
짧게는 피리
눈동자를 끔뻑이는 지팡이의 이름은
그림자에 의지해 시간이 흩날려 쌓인 사막을 건너며 지워져버릴 길을 만드는 오아시스
짧게는 낙타
하얗고 큰 그리움을 올리는 배의 이름은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얇고 부드러우나 때때로 구겨지는 푸른 비단을 항해하는 여행
짧게는 돛단배
사라진 별의 반짝임을 쓰는 마음의 이름은
아잔타 석굴의 먼지벌레가 두고 온 공간에게 쓰는 편지
짧게는 시
♧ 신호등 앞에서 - 오석륜
장례식장으로 가는 버스가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빨간 신호등에서 걸어 나온 붉은 빛들의 입자가
버스 유리창으로 몰려간다
매 달린다
떨어지지 않는다
빛들이 좀 더 죽음의 집행을 보류하라는 것인지
신호가 바뀌지 않는다
신호등이 고장난 줄 알고
조바심난 몇몇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죽음 앞을 지나가고 있다
♧ 참다운 시력 - 황원교
갈수록 시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안경을 새로 바꿨더니
일순간에 어스름이 걷히고
꽃들이 제 빛깔을 내며 내게로 걸어온다
이상하다, 점점 심각해지는 노안인데
안경 하나로
어둠 속의 것들이 되레 또렷이 보이기 시작하다니
이제야 개안(開眼)이 되는 것일까
창밖은 이미 캄캄한데
갑자기 먼지 낀 책상 위가 환해지며
꼭꼭 닫혀 있던 책들의 문이 열리고
경전 속 활자들이 횃불처럼 빛나는 시간,
나이 든다는 게 허무한 일만은 아닌가 보다
언뜻 한 점의 먼지가 된 내가 보이고
별들이 서로에 대한 그리움으로 반짝이는 밤,
캄캄한 허공을 뚫고나온 흰 팔 하나
지나가는 구름을 부지런히 걷어내고 있다
♧ 낙화 - 정순영
숨어서도 아리따운
은일隱逸의 꽃이 아니라서
마음을 비우려니
욕심이 고통스러워한다.
촛불처럼
조용히 스스로를 사르면서
언젠가는
미련 없이 스러지기를
밤하늘에
흔적을 태우는 별똥별도
부럽지 않다.
티 없이 맑은
신새벽의 생각 속에
이슬 머금은
꽃잎이 지고 있다.
♧ 윤달 - 주수자
제삿날 노랗게 익은 둥근 달을 굽는다
오래 전 유년의 한 구석 불 속을 뒤적거리며
나는 열쇠와 단도로 오래된 꿈을 파헤친다
검은 무한의 꿈에서 탈출한 달
반달이 되고 하현이 되고 흰 눈썹달이 되어
시간의 벽에 아프게 부딪혀
첫울음 소리를 냈다 붉은 달빛 서러움으로
소리 없이 흘러가는 달무리 그 품에서 어지럼증과
밤꽃과 청색 구름들이 차례대로 익어갔다
달의 기억으로 모아 만든 아이들이 지나갔다
첫 번째, 두 번째, 자기네들끼리 속삭이며
이제 길고 짧은 순례의, 기억의 끝
윤달이 허공에 누워있다
한 손으로 밤을 지우는 암흑처럼
불과 물과 울음을 잃어버린 그림자 윤달이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詩’ 7월호와 능소화 (0) | 2013.07.10 |
---|---|
내일을 여는 작가의 시와 유동 (0) | 2013.06.29 |
김광렬의 시와 섬초롱꽃 (0) | 2013.06.04 |
우리詩 6월호와 인동꽃 (0) | 2013.06.02 |
우리詩 5월호의 시 (0) | 2013.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