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에서 내는
‘내일을 여는 작가’
2013 상반기호가 나왔다.
기획특집 1은
‘권력과 전유의 기술, 교묘한 통치술’로
현재 우리 권력이 어떻게 특정 언어, 상징, 코드 등을
전유하고 자기 식으로 재배치하는 가를 점검했고,
기획특집 2는 르포문학으로
‘스스로 고립을 선택하는 자들’을 찾았다.
특집으로는 예고한 대로
‘작가’지가 배출한 신인 특집으로 꾸몄다.
읽다가 시 몇 편을 골라
유동꽃과 함께 올린다.
♧ 동백 - 김광선
혹여 그 자식 살아 있을지 모른다고, 외딴섬
바닷가 뼈만 앙상한 동백 한 그루
성성한 눈빛
난리 통에 국방군으로 나가서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아들 하나 전부라서
뱃사람 아낙네 딸년 집
평생을 눈칫밥으로 산 서러운 동백 한 그루
허나 기다림은 외로워도 행복해서
갯바람 들숨날숨
억새풀 흐드러진 날 아흔아홉 기다림을 접은
동백 한 그루
이제야 물어물어 훈장과 상장이 찾아온단다.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그렇게
갯바람처럼
전사자로 밝혀져 그 부대에서 찾아온다는
아들의 흔적
파도처럼 일렁이다가
서로가 물살처럼 비껴가버린 섬은
매운바람 끝
동백꽃이 울컥울컥 선혈처럼 피어난다
♧ 사랑 - 박두규
꽃 피기 전 꽃 오고, 꽃 피기 전 꽃 간다.
피고 지는 것이 사는 일의 질서라고는 하지만
저마다 사정이 있어 먼저 피고
저마다의 모진 사연 하나로 먼저 진다.
그렇게 사랑은 언제나 통속적으로 오지만
어둔 밤 팽팽해진 궁륭의 우주 속으로 꽃 하나 피고
그대의 소실점에서 세상을 뒤돌아보는 순간 꽃 하나 진다.
그토록 꽃 피우는 일이 또한 꽃 지는 일이다.
꽃 피기 전 꽃 오고, 꽃 피기 전 꽃 간다.
♧ 벚꽃 핀 천변으로 갔다 - 송태웅
벚꽃 핀 천변으로 가기 위해 세 곳의 신호등을 건넜다
벚꽃 핀 천변의 황홀을 만나기 위해 세 번의 기다림을 견디고
아스팔트 절단기 정비점과 대형 냉장기 취급점들을 지났다
벚꽃 피워낸 나무들의 환부를 쓰다듬으러
천변의, 내가 아주 오래 전에 밤새워 소주를 마시던
포장마차들이 줄지어 선 길가를 지나 천변에 들었다
나무의자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지만 라이터가 없었다
벚꽃 그늘에 앉아 나는 내 생이 아주 더디게 점화된다고 느꼈다
아니 이 세상은 온통 불의 천지임에도
나는 아직도 그 불씨 하나를 못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라이터 한 개를 사기 위해 도로로 올라와
내가 아주 오래 전 쉬 점화되던 시절
밤 새워 소주를 마시던 포장마차들이 줄지어 선 곳을 지났다
라이터 한 개를 사기 위해 세 곳의 신호등을 건너고
아스팔트 절단기 정비점과 대형 냉장기 취급점들을 지났다
벌써 벚나무에 매달렸을 꽃잎들이 성기게 날렸다
라이터 한 개를 사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고 꽃그늘에 앉았다
벚꽃잎들이 눈 가늘게 뜨고 담배를 피워 물고 서성대고 있었다
벚꽃잎들은 벚나무의 생에 불붙은 불꽃이었다
찰라의 불꽃이 타올랐다는 기억 하나로
생에 다가오는 온갖 신산고초마저도 황홀하게 할 것이다
아스팔트 절단기는 흉한 소리를 내며 아스팔트를 절단할 것이다
대형 냉장기는 수리돼서 한때 뜨겁던 기억들도 끄집어 낼 것이다
♧ 사랑 - 이규배
나는 믿어왔다, 빈집을 떠나
햇살 멍드는 바다 끝 하늘로 당신이
사라지고
집중되는 바람소리를
동공(瞳孔)에 간직하며 말라가는 영원의 날을,
그러나 당신이
산산히 흩어진 날로부터
바삭거리며 마르는 검은 눈동자의
나는
당신 살 냄새 한 점 걸리지 않는 거미줄 치고
밤이슬을 적셔가며
빈집의 처마 밑을 기어 다니는
늙어가는 거미가 된 것인가?
♧ 운주사 깊은 잠 - 이명윤
그들의 꿈에 잠시
스쳐가는 풍경처럼 다녀왔다
눈썹이 지워지고 입술이 지워져가는 석불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느 날 눈이 사라졌으니
잠에서 번쩍 눈뜰 염려가 없고
입술이 지워졌으니
또다시 저녁이 와도 끼니 걱정 안하실 일
무심한 얼굴을 더듬어 내려오다
두 손으로 곱게 모은 기도를 보았는데
언젠가 불타는 세월이
기도 앞을 쿵쿵거리며 뛰어다녔을 때도
철없이 눈썹을 쪼던 새가 어느덧 눈이 멀어
발등에 떨어져 죽었을 때도
꿈쩍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 기도보다 깊은 잠에 빠진 까닭이다
점점 얼굴이 지워져가는 얼굴들이
착한 아이들처럼 나란히 앉아
세월 좋게 주무시고 있었다
덩그러니 코만 남은 얼굴이
아침도 벗고 저녁도 벗고 훌훌 표정도 벗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떤 분은 아예
자리를 깔고 하늘 아래 누워 계셨다
신기한 듯 쳐다보는 사람들을
(허공에 주렁주렁 박힌 창백한 눈과 입들을)
본체만체
저들끼리 야속하게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마지막 밥은 노래로 - 정우영
-은명에게
내 귀가 성급하게 레퀴엠으로 스며들 때,
아파트 사방 막힌 델 넘어 큰 벌이 날아들었다.
놈은 훌쩍 튀어 거실등 안에 기어들더니 꼼짝 않는다.
내쫓으려 파리채 들고 위협하다가 멈칫거린다.
살지 못할 데라 여기면 어련히 나가지 않겠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쿵,
서러운 말 하나가 떨어진다.
기별, 기별이다. 오늘은 은명이 발인.
저 너머로 가기 전, 내게 머물러 왔는가.
이것이 그의 마지막 유숙인가.
시 청탁에 응하지 못한 그 나름의 답변인가.
처음에는 벌이어서 약간 두려웠으나
파리가 아니라 벌이라는 점에 안도한다.
나비보다도 낫다. 나비는 너무 가볍지 않은가.
명은 좀 세질 필요가 있다.
그곳에서야 침 꽂을 일 없겠지만
또 모를 일이다. 거기서는 붕붕 좀 날래지고
궁둥이도 분명 빵빵하게 부풀릴 것이다.
그러니 안심해도 된다고 명은 이르는 겐가.
거실등 속에 있던 벌이 웅웅거린다.
나는 레퀴엠은 접고 김추자의 아침을 불러들인다.
이 발랄한 율동의 아침을 언제나 기억하라.
이 노래가 너와 나누는 이승의 마지막 밥일 것이다.
서둘러 우주로 돌아가는 길,
이 밥 먹고 너는 이제 하염없이 즐거워져라.
♧ 겨울 적벽 - 염창권
칼 맞은
상처가 절벽에 낭자하다
저 벼랑의 처참을 바로 보지 못한다. 아래엔 물 메아리 감감돌아 꾸렸으니 누군들 마음을 꺼내 피륙을 짜나보다. 긴 불면의 내장을 도려 절벽 하나 마주칠 때 발바닥이 밀고 가는 수평 밑은 칼날이다. 오래 널 기다렸다 한 곡조 우려내니 얼음장 위 비상 같은 흰 눈발이 구른다.
한 소리, 강 건너고 있다.
울울탕탕 허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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