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장마에 피는 산수국

김창집 2013. 6. 22. 07:41

 

산수국은 꽤 오랫동안 피는 꽃이다.

자잘한 뭉텅이 꽃봉오리가 뭉쳐서

몇 개씩 번갈아 피다 보면

긴 기간이 걸리고

말라죽을 때까지 계속 그 모양을 갖춘다.

네잎 클로버 같은 꽃은 벌이나 나비만을 부르는

헛꽃으로 흰색에서 노랑색, 파랑색, 보라색 등으로

변하다가 말라버린다.

 

산수국은 범의귓과에 속한 낙엽 관목으로

산골짜기나 전석지에서 자라며, 1미터 정도 자란다.

잎은 마주나고, 7~8월에 흰색, 하늘색 꽃이 핀다.

열매는 삭과로 우리나라의 중부 이남 및

일본, 타이완 등지에 분포한다.

 

 

♧ 산수국 - 김승기

 

타는 여름

메마른 언덕배기 위에

멈춰버린 풍차

흉물스럽게 서 있다

 

봄부터 시작된 가뭄

바람마저 그친지 오래다

 

가을은 아직 멀리 있는데

계속되는 여름 건조주의보

더 이상 물로는 전기를 만들 수 없다

비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동심의 천정

옹알이하는 아가의 눈동자

그 깊은 우물 안에서

파랑나비로 날던 모빌,

색 바랜 사진으로 남게 할 수는 없다

 

쳐다보면 별빛 하나 없는 밤거리

외로워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눈맞춤하고 싶은 갈증

그 끝에서 돋는 바람개비

다시 돌려야 한다

 

내 안의 마르지 않는 풍차

푸른 바람개비를 위하여  

 

 

♧ 산수국 - 최원정

 

푸른 나비

떼지어

꽃으로 피었다

 

그 꽃 위로

하늘빛 내려 와

나비방석 빚어 놓았으니

잠시 쉬었다 가자

 

다리 쭉 뻗고 앉아서

긴 호흡으로

가뿐 숨 고르며

갈 길, 서둘지말고

 

가만히 봐

푸른 나비가

꽃으로 핀

저 고요한 날개짓 

 

 

♧ 산수국 - 김인호

    --섬진강 편지20

 

보란 것 없이 사는 일

늘 헛되구나 그랬었는데

 

왕시루봉 느진목재 오르는

칙칙한 숲 그늘에 가려

잘디잘고 화사하지도 않은

제 꽃으로는 어쩔 수 없어

커다랗게 하얀, 혹은 자줏빛

몇 송이 헛꽃을 피워놓고

벌나비 불러들여 열매를 맺는

산수국 애잔한 삶 들여다보니

 

헛되다고

다 헛된 것 아닌 줄 알겠구나   

 

 

 

♧ 산수국꽃 - 김용택

 

아침 저녁으로 다니는 산 아래 강길

오늘도 나 혼자 걸어갑니다

 

산모롱이를 지나 한참 가면

바람결처럼 누가 내 옷자락을 가만가만 잡는 것도 같고

새벽 물소리처럼 나를 가만가만 부르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 자리를 그냥 지나갑니다

 

오늘도 그 자리 거기를 지나는데

누군가 또 바람같이 가만가만 내 옷깃을 살며시 잡는 것도 같고

물소리같이 가만가만 부르는 것 같아도

나는 그냥 갑니다

그냥 가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가만히 흔들렸던 것 같은

나무이파리를 바라봅니다

그냥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갑니다

다시 가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가만히 서 있다가

흔들렸던 것 같은 나뭇잎을 가만히 들춰봅니다

아, 찬물이 맑게 갠 옹달샘 위에

산수국꽃 몇송이가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나비같이 금방 건드리면

소리 없이 날아갈 것 같은

꽃 이파리가 이쁘디이쁜

산수국꽃 몇송이가 거기 피어 있었습니다

 

 

♧ 숲에서 듣는 소리 - 이보숙

 

언제부터 밀어올리고 있었나

깊고 어두운 땅 밑에서

연갈색의 솜털 안에 밥풀알 같은 하얀 꽃순을

 

한여름을 향하여

내면에 가득한 수액 속으로

백자색의 꽃잎을 빚어내는,

녹색 잎새의 날카로운 톱니를 만들어 내는,

저 야성의 청초한 자태를 구성해 내는,

산수국의 힘찬 진동을 나는 듣고 있다

 

목덜미 속으로 기어드는 차가운 바람

내 가슴 자락에 부채질이라도 하듯

여기 저기 솟아나는 붉은 반점들,

깊이 남겨진 내 안의 상처들을 보듬으며

뽀얗게 돋아나는 연두빛 기운들

 

맑은 빛깔의 봄 내음을 내게로

전송해 오는 소리

쿵쿵 땅 밑에서 들려온다   

 

 

 

♧ 가짜꽃 - 김종제

 

들판에 흔한 산수국

고이 옮겨 마당에 심었는데

오뉴월 땡볕에 참꽃 다 지고

마짝 마른 몸 그대로 간직한

헛꽃만 달려있네

어쩌면 변방의 유배지로 쫓겨가

살붙이고 뼈세우며 살다가

저를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어서

한 판 들어엎고 싶었던

내 아버지의 아버지 같고

시골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고운 옷 걸쳐 입고

양산 쓰고 서울 나들이 가고 싶었던

내 어머니의 어머니 닮았네

저 산수국

거짓부렁이 같은 생이

처절하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해서

엄숙하고 단단한 껍질을 덮고 있는

세상 골려주고 싶은 것이네

헛깨비에 속아 노는 꼴을

한바탕 구경하고 싶은 것이네

그래서 달콤한 향기 찾아가는 구별도 없고

쓸모 없는 벌레 모여드는 경계도 없는

꽃을 만들고 싶은 것이네

주변도 없고 가장자리도 사라지고

제 자리 모두가 중심이 되는 참꽃 같은

헛꽃 한 송이 보고 싶은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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