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마삭줄 바람개비

김창집 2013. 6. 24. 08:10

 

비가 올 것 같아

택한 저지오름 올라

분화구로 들어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가 본 마삭줄

시기가 좀 늦긴 해도

아직은 볼만하다.

 

볼 때마다

달콤하고 짙은 향기와

바람개비처럼 날렵한

그 모습이

옆으로 다가서게 만든다.  

 

 

♧ 마삭줄 - 김승기

 

병원을 나서는 길

꽃가게를 지나다

화분 위에 올려진 마삭줄 보았네

 

둘러쳐진 철사 그물망

조그만 울타리 안에서도

바람개비 돌리며 하얀 웃음 날리네

 

어쩌다 올려졌을까

여기저기 줄기 감아올리며

남쪽의 산기슭 휘젓고 있을 몸이거늘

 

온실에서 피웠을 게야

지금쯤 부스스 겨울잠 깨어

꽃눈 살펴야 할 때 철없는 웃음꽃이라니,

 

얼마나 구박이 심했을까

북쪽까지 실려와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때 이른 꽃 피우며

비좁은 구덩이에 뿌리를 박아야 하다니

 

나도 너와 무에 다르랴

이 산 저 들판 꽃향내 가득해도

겨우 바람에 묻어오는 향내나 맡을 뿐

 

마비된 팔다리

눈까지 가물가물

가까이할 수도 없는 것을

 

어디고 오가지 못하는

병에 물린 몸뚱이

빈 가슴 찬바람만 스미네   

 

 

♧ 바람개비 - 유소례

 

지축 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처럼

이 날, 내 길의 걸음은

허방에 앉아 근심만 쌓는다

 

물의 흐름을 받아

물례방아는 힘을 얻고

방아공이는 확 속의 정곡을 쳐야

뉘 없는 알곡이 될텐데...

 

내 바람개비 마음은

바다로 달리다가 산을 오르고

들을 헤매다가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에 어리는

추억을 건지고 있으니...

 

겉은 엄숙하나

속은 텅 빈 허방을 만들어

당신 앞에 내 속의 영혼을 내놓으려니

공연히 얼기설기 실타래 엉클어지듯...

 

 

♧ 풍력계 바람개비의 자유 - 김윤자

   --오스트리아 문학기행

 

향기로운 바람이 불 때

그곳에는

바람을 담아

자유를 생산하는

풍력계 바람개비가 있었다.

구름이 몰려와도

물안개가 사위를 휘돌아도

결코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우람한 기둥과 균형진 날개의 평화

푸른 들녘을 가득 메운

장엄한 행렬, 환상적인 숨결

헝가리에서

국경선을 넘어온 초입의

고속도로변에서

차가 달리는 시간으로 이십 분 동안

흐르는 물줄기처럼 이어지는 저 풍경은

이념의 끈을 놓아버린

무아의 자유, 경계로부터의 자유

오롯한 영역에서

하얗게 나부끼는 영혼의 자유였다.  

 

 

♧ 바람개비 - 공석진

 

그대는 바람개비

하이얀 손

가담가담 바람불어

수줍은 얼굴 붉히는

 

그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

콩닥콩닥 바람불어

가슴 설레이는

 

그 바람을 맞으면

가슴길까지

새악새악 바람불어

사랑을 마중 나오는

 

그대는   

 

 

 

♧ 호미곶 바람개비 - 김근이

 

바람개비가 돈 다

모두가 신기하게 처다 보는

하늘 한 복판에서

 

돌고 있는 지구처럼

돌아가는 세상처럼

비를 돌리고

낙엽을 돌리고

 

높은 꼭대기에 매달려

하늘에 목을 매고

세월과 함께

인생을 돌리고

 

묘(妙)한 분신(分身)의

넋 인양

햇볕이 부서져 내린다

그림자가 흩어져 내린다

 

조용한 울림으로

소리 없는 함성으로

오늘도 호미 곶에는

바람개비를 돌리는

바람이 분 다   

 

 

♧ 바람개비 인생 - 강진규

 

일기장 속으로 흔들리는 바람개비

헛도는 풍경

머언 눈으로 바라보면

계절은

자꾸만 추워온다

 

추워지는 일기장 갈피마다

투명하게 살아온 날들

낯선 바람에 휘휘 내몰리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야 하는

한 생애가 추워진다

 

빙빙 도는 세상 그 어디

자욱한 모래바람,

바람보다 먼저 누운 풀잎은

끝내 일어설 줄 모른다

어지러워 어지러워서 흩날리는

바람개비 끝없는 영혼

 

빈 들녘

쥐불을 돌리듯

누군가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을 부여잡고

이 땅을 돌리며

다시 돌리며 떠나가고 있다

    

 

♧ 바람개비 - 김희철

 

선풍기 날개가 돌지 않는다

동작 버튼도 멈추었고

바람 세기 버튼도 멈추었고

시간 선택 버튼도 미이라가 됐다.

 

상한가 치는 더위

관리대상 종목으로 전락한

짜증 틈바구니에서

 

바람개비만 돌아간다

종이 날개만

제 힘으로 계단을 달려서

7층 아파트 베란다로 날아간다.

 

아파트 단지는 미이라가 됐다

숨박꼭질해 버린

놀이터에서도 사람들은 미이라가 됐다.

 

일요일 오후 2시

정전만이 피라미드를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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