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의 햇살은 오전과 오후를
구별하여 내려쪼이진 않는다.
그러나 바람도 통하지 않은
길섶 담벼락에 바짝 엎드려 피는
이 애기범부채야말로
온통 붉은 색으로 무장하고
그런 햇살을 즐기는 듯하다.
어디서 나서 자라다가
척박한 이 제주 땅에 들어와
가뭄까지 든 땅을 장식하고 있는고?
♧ 꿈, 유혹 그리고 중독 - 김광렬
몸은 썩어도 꿈은 썩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
노래를 위해 목청이 갈라지고 또 갈라졌을 사람과
하염없이 독을 깨고 또 깼을 사람과
원고지를 찢어내고 또 찢어냈을 사람과
꿈은 유혹이다
유혹은 중독이다
꿈에 중독된 사람들은 행복하다
꿈이 없다면
삶에 향기가 날까
♧ 면이 말이야 - 김경훈
다소곳하게
착착 안겨야지
이건 말이야
까칠하고
뻣뻣하게 대들며
한 대 칠 기세니
미스 박이 아니고
그 집 짬뽕 말이야
다신 먹나 봐라
♧ 봄비 - 김영미
취하도록 흠뻑 젖었다
온힘을 다하여 꽃망울을 틔워야할
조팝나무가 된 것 마냥
♧ 파도는 봄날 - 김순선
파도는 봄날
삼단 드레스를 입고
플라맹고를 추며 다가온다
살랑살랑 하얀 레이스를 흔들며
겨울 내내 얼어붙었던 흉흉한 마음에
달콤한 봄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삼고초려 하듯
겨울의 잔재를
마음의 갈등을
꽃샘추위조차 보내버려야 한다고
화해의 손 내민다
♧ 남방큰돌고래· 2 - 현택훈
자전거를 타는 건
바람 속을 헤엄치는 것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는 건
음악 속을 헤엄치는 것
차창에 흐르는 빗방울을 사진 찍는 건
시간 속을 헤엄치는 것
우리는 모두 바다 속을 유영하(겠)지
월정리 바닷가 고래가 될 카페 이름처럼
고래가 될, 아니 이미 고래가 된
사람들, 마을들, 슬리퍼들
너의 마음속에서 헤엄치던 날이 있었지
어린 마음은 낯선 공항의 검색대에서처럼 불안했지
이제 다시 만난 자유는
푸른빛 자전거 페달처럼 돌아가지
시간 속을 헤엄치는 건
구럼비 앞 바다 속을 헤엄치는 것
바람 속을 헤엄치는 건
태국 소녀의 발가락을 간질이는 것
음악 속을 헤엄치는 건
제주 바다를 한 바퀴 도는 것
♧ 땅꽃 - 이애자
눈물 맺힌 날에도 맑게 웃어 보이더라
허리가 아플 때면 허리가 어디 있냐는……
한없이 저 작은 키 앞에 무릎을 꿇고 싶다
♧ 뉴스 한 컷 - 김진숙
쿵, 하니
아파트 바닥으로
몸을 던진
절망
또
절망
끝까지 살았어야지, 실시간 댓글 위로
외마디
신음도 없이
동백꽃은
또
지고
♧ 능소화 지는 날에 - 김영란
슬며시 그림자가 행선지 바꾸는 오후
옛 사랑 입맞춤 같은 마파람 불어온다
시간의 간극을 따라
밀려오는
그리움
은갑사 꽃물 들여
옷 해 입은
저녁놀
열대야 수평선에
아롱아롱 피어서
한 뼘 더 늘어난 목을
살며시 와 기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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