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권경업 시집
‘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을
집어들었습니다.
읽다가 몇 편을 옮겨
어제 인터넷이 안 되는 시간을 이용하여
잠시 운동 겸 꽃소식을 물으러 갔던
한라수목원에,
더운 여름 한철 피워댔던 소황금,
원래 자생하던 백약이오름은 아니지만
박각시 부지런히 드나드는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찍은 사진과 곁들입니다.
♧ 한로(寒露)
세상이 다 애처로운 아침입니다
취밭목 길섶 제 혼자서 피어
끝내 한로 찬이슬이라고 우기는
저 가여운 들국화를, 누가
밤새 눈물 머금게 하였습니까
♧ 봄바람
간지럽다며 강물은
여린 살결 뒤척입니다.
‘간질이지 마, 간질이지마.’
겨우네 꽁꽁 품어두었던
뾰얀 가슴, 키득키득
봄바람 앞에 간지럽습니다
♧ 우수
언제부턴가
엄동의 조개골 비집고
실낱같은 물길 열더니만
보세요, 큰일났어요
그 물길 흘러 흘러
밤마다 가슴엔 막막한 홍수
♧ 취밭목 1
누군들 없으랴
지친 삶의 쓸쓸한 모퉁이
떨군 고개 조용히
되뇌어 부를 이름 하나쯤
너는 나의 그런 그리움이다
하늘 아래 가장 따뜻한
♧ 숫눈길 1
아무도 울어보지 않은 길
갈참나무도 힘겹게 서 있는
볕들지 않는 천태산* 북쪽 비탈
그대에 앞서, 뽀득 뽀드득
먼저 울고 싶었습니다, 울면서
그 작은 걸음으로 가지런히
나를 밟고 가기를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하얀
숫눈길이 되고 싶었습니다
---
*천태산 - 경남 양산군 원동면에 있는 산
♧ 숫눈길 2
그대에게 가는 길은 발 시립니다
지워버린 오솔길
다가오지 말라는 숫눈을 밟아
걷고 걷다보면, 또 눈은 내리고
언젠가는 산벚꽃 하얀 꽃눈도 내리고
그때는 시린 발을 잊을 겁니다.
♧ 가을에게
배경으로 한, 한없이 투명한
너 푸른 빛 때문일까
보이지 않는 발걸음에 내 귀는 시리고
소리 없이 전하는 바람결에
들끓던 가슴은 스산하여
나는 서성인다
뜨겁던 여름날, 먼빛으로
너를 예감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이 아침이
그 어느 때보다 막막하여
나는 떨고 있다, 두려움은 아니라 말하지만
흔들리며 가야할 너와의 길이
저 쑥밭재 길섶 억새처럼, 밤마다
하얗게 울음으로 피어날 그 일이 걱정이구나
흔히들 쉽게 말하고 쉽게 지워버릴
그 무엇으로는, 정녕
너를 맞지 않으련다
♧ 순두부
돌콩 같은
야물고 단단한 나를 으깨어
거칠고 쓰잘데 없는 것
펄펄 끓여 거러내고, 다시
쓰리고 아린 간수로 정화시켜
여리고 하얀
순두부로 태어나고 싶다
후후 불어가며 즐겨먹을
너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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