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사상 시선 31
홍성운 선생의
‘오래된 숯가마’를 폈다.
시조가 그렇게
감칠맛 나는 장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낀다.
동향(同鄕)으로
나이 차이가 쬐끔 있지만
느낌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 아침
다시 한 번 시심에 젖어본다.
♧ 소나기
“무사 와렴시니?”*
포주의 입담처럼
보채던 열대야가
일순 후두두득
거미줄
퍼억 뚫렸다
오,
빗줄기의 힘!
---
* 무사 와렴시니? : 왜 서두르니?
♧ 쇠기러기의 시간
기다리던 답신 오듯 층진 울음이 와
섬은 살풍경 놓아주며 소리에 젖어든다
단풍 숲 건너왔는지 정강이가 발갛다
지의류 선태류 덮인
툰드라 극지에서
제 깃털 떨어내 둥지 하나 만들고
북방의 습한 여름을
뜨겁게 껴안았을
빙점이 가까워지면 활강은 시작된다
기류에 잇대는 어린 새들의 편대
이념과 국경을 넘어 먼 기억의 섬으로
빛과 소리로 여는 늦가을 첫새벽
추수 끝난 밭에서 이삭 줍는 쇠기러기들
살갑게 대화 엮는다
아날로그 혈육의 사간
♧ 할아버지의 명함
고백컨대 할아버지는 먼 기억의 무늬 같다
만장처럼 꽃잎 날리던 서너 살의 봄날
훈장의 호칭마저도 훌훌 털고 떠나셨다
세월은 흐른다 해도 아버지의 시간이 머문
작은 함에 간직해둔 오래된 명함 한 장
불현듯 의식을 넘어
일제 강점기 초상을 본다
단 한 줄 '濟州郡 新右面 洪如天'
누군가에게 여기 있다
말하고 싶었을까
온 면을 세내서까지
기다리는 분 있었을까
서울에서 바라보면 좌우로 갈리는 섬
지금이야 신우면은 애월읍으로 바뀌었지만
바람 든 섬 끝 하늘에 문패로나 뜨는 달
♧ 어떤 문답
어느
문학평론가
‘하필 이 시대에 시조냐?’고
반세기 그리 우려도
더 짜낼 색소 남았는지
말 끝에
‘뚝’
지는 단풍잎 한 장
부동산이
동산 되는
♧ 부록富祿 마을
1
폭우라야 갈증을 푸는 화산섬의 건천들도 제 터를 만나면 느릿느릿 에둘러 간다
한라산 먼발치에 앉은 댓잎 성성한 부록 마을
2
시골 아낙 분바르듯
눈발이 무겁던 날
도시의 유랑기질
묶어놓고 싶어서
초저녁 별무리 뜨는
농가에 짐을 부렸다
3
시골이 다 그렇듯
정낭 없는 올레가 있다
과원이 뿜어대는, 매화 향기, 귤꽃 향기
내 유년이 곰삭은 길목
겨울나고
여름을 나고
♧ 북새통
말맛을
알고 나서
시어 한 개 꺼내려는데
북과 쇠들 사이, 베틀 북이 오가는 사이
내 사유 끝이 보일까
북적이는
언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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