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9월호의 시

김창집 2013. 9. 14. 18:17

 

다시 우리詩 9월호를 펴본다.

감칠맛 나는 작품이 이곳저곳에 많다.

특히 임보 선생님의 선시가 좋다.

9편 중 아껴 한 편만 싣기로 한다.

 

작년에는 8월호의 시에 두번째로

참마꽃을 같이 올렸었는데

올해 찍은 꽃도 다시 싣는다.

참마꽃은 그 분위기와 여백이 너무 시적이다. 

 

 

 여로 - 정순영

 

평탄한 길에는 굽은 고갯길이

꽃샘바람은 싱그러운 꽃바람으로 불고

꽃봉오리의 설레임은

열정(熱情)의 만개(滿開)

하롱하롱 떠나가는 아쉬움으로

가야하는 길

무너지는 아픔은 평안의 손을 잡고

여긴 그냥 지나가는 길

떨어지기 위하여 피어나는

꽃들의 땅에서는 머무를 곳이 없나니. 

 

 

♧ 시 1 - 박승미

     --낙엽

 

나는 연필로 시를 쓴다

사각사각

낙엽 위에 달빛 고이는 소리가

달빛 사이로 들어온

나뭇잎 한 장

나의 시. 

 

 

♧ 겨울나무로부터 - 임채우

 

나무가 나무인 것은 서 있기 때문이다

섣달 칼바람 맞으며

외로운 나무들 서 있는 것이

어떤 나무는 창검처럼 곧추서고

어떤 나무는 이웃에게 기대고

각자 계절을 몸으로 견디며

주저앉거나

눕지도 않고

칼바람 맞으며 서 있는 것이

나무가 나무인 것이

나무 하나 외로움이

또 하나의 외로움이

여기저기 우뚝우뚝 어둑서니처럼

깨 홀딱 벗고 겨울숲을 이루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입술 깨물고

자세 허물지 않고

몸으로 맞서 무리를 이루었다

산등성이에서 바라보는 강

두꺼운 얼음장이 강물과 배를 맞대고

하얀 눈을 뒤집어쓴

죽음의 강

고요한 억압이 잠들고

숨골 터지는 소리마저 자자들어

음모까지 얼어버린 강

반란도

혁명도

누어 잠든 강

겨울이 일어선다

창끝에 찔리고

칼날에 베이며

내 안에서 터지는 균열이

죽창 들고 일어서는 함성이

모반이

혁명이

일어선다

그대, 서 있는 자의 고통이여

그대, 서 있는 자의 희열이여

나무가 나무다운 것은 서 있기 때문이다 

 

 

♧ 독 - 임보

 

무악(巫岳)이란 늙은이는

아침에

마당 동편에 놓여 있는 백 개의 독을

마당 서편으로 옮겨 놓고

오후엔

서편 마당의 독을 다시

동편 마당으로 옮겨 놓기를

날마다 되풀이하고 있다

이 무슨 쓸모없는 짓거린가고 물으니

내 하는 일은 무언가고 무악(巫岳)이 되묻는다.

글을 쓰는 일이라고 대답했더니

그 늙은이 웃으며 이르기를

말을 늘어 놓는 일이나 독을 늘어 놓는 일이

다를 게 무어냐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내가 평소 비웃었던 그 바둑쟁이들이

밤을 새며 바둑알을 열심히 나르는 그 놀음이나

내가 심지를 돋으며 밤 깊도록

말들을 날라다 시(詩)랍시고 얽어맨 일들이

다 그게 그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 그릇 -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 명금폭포 - 이하석

 

  저 폭포는 나의 안으로 쏟아져 폭발한다. 모든 밖이 나의 안이다. 모든 안이, 나의 상처이다. 가파른 절벽의 무지개로 걸리는 솟구치는 마음의 우레.  

 

 

♧ 처서 - 장석남

 

마른 빨래는 방안으로 던지고

덜 마른 빨래들을 처마 아래 건다

 

나뭇잎이 쩡쩡 소리내며 물든다

 

전기 검침원의 오토바이 소리 오솔길을 미끄러져 내려가고

나는 바지춤이 풀린 줄도 모르고 그를 배웅했다

 

담장 밖에 아무렇게나 몸 버린 구절초는 구절초

빈 몸의 옥수숫대 끝에서 새가 울어

건너 산이 건너온다

 

이해가 가지 않던 일들 몇 내놓기 좋다

덜 마른 빨래를 한번 더 손에 쥐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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