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 11월호가 나왔다. 권두시는 김춘수의 ‘황혼’을 내세웠고, 칼럼으로는 임채우 시인의 ‘통찰력이 뛰어난 시’를, 그리고 이상개 홍해리 김규성 김리영 위상진 허금주 홍예영 최가림 이재부 박지우 박권수 김일곤 전비담의 시 각 2편으로 ‘신작시 13인 選’을 꾸몄다.
‘시지 속의 작은 시집’은 이범철의 ‘그 숲에 들다’외 4편을 ‘시작노트’와 함께, 박동남의 ‘황혼의 계절에’외 4편은 정일남의 해설과 함께 실었다. 테마가 있는 소시집은 이무원의 ‘물 詩 1’외 9편과 시작노트를, 시인이 읽는 시는 박승류의 ‘시인의 계절 앓기’, 한시한담은 조영임의 ‘수암 권상하와 제천의 황강’, 명작비평으로 어순아의 ‘폴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 양선규의 인문학 스프는 ‘수․파․리(守破離)’, 특집 ‘시인들, 과학에게 듣다’는 조창호의 ‘왜 힉스일까?’, 독자시단에는 고미경과 나영애의 시 각 2편씩을 실었다.
10월 마지막 날에 장애우들과 서우봉엘 올랐다. 그 오름에서는 곳곳에 11월을 알리는 산국(山菊)이 피어 있어 잠시 카메라에 담았는데, 그 꽃과 함께 우리詩 11월호의 시를 골라 싣는다.<!--[endif]-->
♧ 시안(詩眼) - 홍해리
한 권의 시집을 세우는 것은
시집 속 수십 편의 시가 아니라
한 편의 빼어난 시다.
한 편의 시를 살리는 것은,
바로,
반짝이는 시의 눈이다.
스스로
빛나는
시의 눈빛!
그 눈을 씻기 위해
시인은 새벽마다
한 대접의 정화수를 긷는다.
♧ 열두 계단의 포인세티아 - 허금주
당신과 나
내려가는 길에 작열하는 붉은 잎
떨어져 내릴 순간에도
붉은 잎 그대로
툭
열두 달을 온통 타오르던
포인세티아
이제 다시는
사랑의 잎으로 생명 받지 않을지니
당신과 나 열두 계단 내려가
엇갈리는 길 따라
그 모습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잠시 더 붉게 타오르거라
♧ 욕망의 가격 - 이재부
썩은 세상엔 파리들이
구더기 열전을 벌인다
뇌물 벼락에 죽은 사체
탈세로 곪은 모리배 환부
부정축재로 배 터진 비만의 송장
애국이 실종된 당쟁터 시체
음란 폭력 사기 절도 썩은 내장
부정한 돈에 찔려 목 떨어진 시신
허욕이 썩는 쓰레기통엔
구더기 열전이 치열하다
양심을 버리고 파고드는
욕망의 가격은 얼마나 될까.
♧ 선물 - 박지우
오래 전 내 마음에 들어와 있어요 나는 당신의 노트잖아요 오늘도 세상 속을 떠도는 당신의 하루를 꼼꼼히 읽어요 가끔은 당신의 휘어진 행간에서 오도가도 못해요 당신의 하루가 걸어가는 소리가 들려요 나의 액자이기도 한 당신, 오늘은 강이 있는 당신의 그림을 보고 싶어요 당신과 나의 경계는 늘 모호해요 그 경계를 넘어선, 당신을 내게 보여주실 거죠
♧ 엽전 세 닢의 죽비소리 - 김일곤
송광사 능허교(凌虛橋) 아래
청룡이 엽전 세 닢 물고 제 그림자 비추고 있다
무지개 능허다리 불사하고 남았다는
엽전 세 푼
청룡여의주에 풍경처럼 매달아 두었지만
백년, 백년 또 백년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는 것
이제야 그 연유 알겠다
겸허한 마음 찾아오는 이, 느린 발걸음 세우고
하늘을 여백에 두고 서면
머리도 젖고 마음도 젖고
저 능허교가 우화각(羽化閣)을 날개 삼으니
오가는 사람마다
욕심의 껍질 벗어 날개 돋았을 터
누가 저 죽비소리 그르쳤을 것인가
하늘에 오른다는 능허다리 아래
미소 한 덩어리 먹고
빙그레 돌아가는 곳
탐욕의 손에 들지 않아 더더욱 무서운
엽전 세 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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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주받은 돈으로 능허교(凌虛橋)를 불사하고 엽전 세 닢이 남아 그 다리 아래 매달아 두었다고 함.
♧ 흔들리는 틈 - 이범철
오늘은 아이 방에 방충망을 달았어
빈 창을 촘촘하게 틈으로 가득 채워 넣었어
그 틈들이 날라가지 못하도록 못질을 하였지
바람이 틈을 흔들고 있어
다행히 틈을 통과하는 순간 모기들은 아주 선해져서
품었던 적의를 잘게 나누어 틈을 통과하지
내게 다가온 것은 이미 적의가 아니었어
모기들은 그저 바람 같았지
틈마저 없으면 너무 어두울 것 같아
그 틈 밖으로는 해마다 가을이 지나갔어
부서지며 통과한 시간들이 낙엽처럼 흩어졌지
그래 본 적이 있었지 너의 발자국 옆을 돌다가 사라진 잎들을
그렇다고 내가 방충망 안에 있는 건 아니야
실은 나도 이제 막 틈을 통과하고 싶었을 뿐이야
저 끌려가는 것들 좀 봐 시간들이었을까
그래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끌고 가지
다들 그렇게 끌려가지 무서운 속도로 보이지 않을 만큼 때로 뜨겁게
때로 무섭게 틈으로 찾아들고 싶어 했지
속도는 틈의 반대편 집에 있어
시간과 반비례하는 언덕 어딘가 살았지
내가 속도의 집으로 천천히 갈 때서야
생각은 그제서 종종거리며 내게 오지
안면의 어떤 틈을 열고 생각은 나오기도 들어가기도 하지
심한 바람 뒤로 틈들이 우수수 떨어졌지
흔들리던 틈과 틈 사이 얇아진 나의 발등을 먼저 들이밀고,
나도 잘게 나누어 틈이 된거야
그때서야 나와 어깨를 붙였던 틈들이 보이는 거야
결국 나는 틈으로 살게 된 거야
그렇게 보지마
틈은 결코 누군가에게 끌려가진 않아
♧ 황혼의 계절에 - 박동남
가을이 익는다
초록이 익는 계절은
차다
뜨겁다
극과 극이 대립한다
떫고 신 생각이 달게 숙성한다
밭이 익어가고 담장이 익고 텃밭이 익고 들판이 익는다
그 빛은 금빛이다
노을빛이다
고분고분한 열매
베어 물면 곱게 순종한다
거칠지 않은 순한 맛 부드러운 맛
연한 벌레에게도 몸을 열어 길을 내 준다
그 길은 어진 길
빛에 물들고 바람에 옷을 벗는다
서릿발이 호통치는 넓어지는 길이다
사라지고, 알몸만 남고, 씨만 남는 길이다
순환의 고리를 따라가는 길이다
그 길은
원색들이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길이다
코스모스가 먼저 와서 몸 흔들며 웃다가
국화 향기에 취해
겨울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다
♧ 물 詩 1 -이무원
- 절정
물과 물이 몸을 섞는다
비운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완전한 합일
하나임을 느끼며
몸 전체로 하나가 된다
확인은 사랑의 병
물은 확인하지 않는다
헤어지면서도 물은
하나임을 느끼며
몸 전체로 하나가 된다
간절하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비단결보다
부드러운 포옹
억겁을 돌아도
추락을 모르는
절정의 꿈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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