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용총 수렵도 - 김성주
겁 많은 내가
말을 탄다는 것
활을 쏜다는 것
엄두도 못내는
내가
그녀를 사랑은 하고
가진 것은 없고
목숨 걸고
멋진 사냥을 결심한 것인데
그녀를 모시고 만주벌판으로 갔네
폼 나게 머리에 깃털을 꽂고
말을 달리며
화살을 날렸네
사슴을 향하여
호랑이를 향하여
커피는 뜨겁고
음악의 선율은 부드러운데
말은 심하게 요동치고
화살이 나는 방향은 가늠 할 수 없었네
분연히 일어선 고구려의 왕녀
내게로
질주하는 말을 타고 화살을 날렸네
“남의 가슴에 독화살을 쏘고도 무사할 줄 알아!”
유빙을 붉게 물들이며, 늑대 한 마리
긴 울음을 우는 것이네
♧ 노을 - 김문택
한 끼니를 싣고
골목을 빠져나간다
몇 개의 골목이
하루치 목숨을 건질 수 있을까
길바닥에 엎드려
호흡을 가다듬는 폐지들
저들의 수명도
늙은 손아귀에 달려 있다
진통제 한 줌 먹고
밥벌이 나서는 손수레
횡단보도, 인도블럭에 주차한 자동차들 때문에
위태롭다
길 위의 할머니
♧ 더불어 살아가자고 - 김순선
제비가 그늘집 티하우스로 날아왔다
까만 연미복 입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가더니
이번에는 두 마리가 찾아왔다
입에는 가는 지푸라기를 물고 있다
“여기는 안 돼!”
아가씨의 단호한 어조에
쫓기듯 날아갔다
잠시 후 또 날아왔다
티 하우스 앞에는 키 큰 푸른 나무들이 즐비한데도
도어 문 꼭대기에 앉아
……
말줄임표를 남긴다
♧ 못다 쓴 시 - 현택훈
- 정군칠 시인
오일장 할머니 장터에 가서
할머니 거친 손 들여다보고
철공소에서 튀는 불꽃을
또 가만히 들여다보고
봄꽃나무 즐비한 꽃집 앞에서
에쎄 클래식 한 대 피우고
삼덕빌라 202호로 들아와
봄동배추국으로 점심을 먹고
금성 오디오로 레너드 코헨 들으며
베란다 야고 분갈이를 하고
도서관 시창작교실 강의 자료를 만들고
필사노트에 좋은 시 한 편 옮겨쓰고
서울에서 교편을 잡는
외동딸에게 이메일로 안부를 묻고
지난 주말에 찍은 동백 낙화 사진을
블로그에 옮겨 놓고
에쎄 클래식 한 대 피우는데
시가 스멀스멀 신병(身病)으로 다가온다
어둠이 찻잔 속으로
침몰한다
♧ 곤밥 - 강봉수
히영 밥은 때 읏이 먹을 수 있던 게 아니엇주
식게나 멩질날 아니문 꼴 뵈리기 읏어부난
아으덜은 식게날광 멩질만 지들리멍 살아서
경 읏이 살멍도 식게 먹지 못 아이덜 찍시
곤 밥 사발에 돗궤기 두 점을 싸 보내고
올레질 치 쓰는 이웃광도 반을 테우멍 살아신디
요즘 싀상 곤밥광 돗궤기 흔전해 노난
궨당 식게날엔 집에 걸러졍 피자 파티곡
멩질날엔 출장가노렌 새벡이 등산복 입엉 나산덴
♧ 소나기 - 현경희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
누구신가요?
유리문에 남겨지지 않은 지문
두두두두
달리는 소리
도망이 시작되고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요란한 도둑에
하늘도 땅도 땀에 젖어
슬슬 화가 날 때쯤
똑똑똑
다시 조용히 문 두드리는 소리
도망자가 스스로
백기를 들고 달아난다
♧ 가을의 끝 - 홍경희
온 마음 물들여 놓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낙심 깊은 골짜기로
떨어지고 싶을 때
새처럼
날리는 문자,
흉곽 속의
긴 울음
♧ 문득 - 한희정
세월이 가면 목탁소리도
절로 익는다는
상좌스님 말씀에도
눈 하나 꿈쩍 않던
행자승 서툰 염불에
그리움이
묻었다.
♧ 코파카바나* - 김영란
남미의 바람은
람바다를 추며 온다
스페인 군대의
칼에 찔려 신음하듯
비틀어 몸 뒤척이는
하늘보다
짙은 바다
아즈텍
전설들이
밀물로 더듬어오면
감전되듯 무너지는
뜨거운 바람소리
황금빛 태양 안으로
날아간다
저 흰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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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파카바나 : 브라질의 중심 도시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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