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작가회의에서 발간하는 계간지 ‘제주작가’는
‘우리 함께 여기에’라는 작은 공간을 할애해서
회원이 아닌 분들의 개성 있는 작품들도 소개하고 있다.
이번 제주작가 가을호에는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섯 분의 시
10편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중에 각 1편씩 골라
늦가을 공중으로 날아오를 바람을 기다리고 있는
으아리 씨방과 같이 싣는다.
♧ 빈 잔 - 김완하
정 선생 모친 장례식장에서
박 선생 소개로 만난 사람
엊그제 연로한 부친 묫자리 보러 가서
좋은 터 있기에 자기 것도 예약해 두었다며
그때 바로 옆자리 예약하는
자기 또래의 사내와도 인사 나누었다며
나중에 묘지 이웃으로 만날 사람이기에
굳게 악수도 나누었다며
처음 본 그가, 죽은 뒤에나
이웃으로 만날 그 사내였기에
점심에 서로 술 한 잔 따라주었다며
빈 잔에 소주 가득 따라놓았네
주변에 함께 앉은 사람들
껄껄껄 허공에 빈 잔 하나씩 채워두었네
어느 사이 상가는 온통 이웃을 위한
이웃의 빈 잔으로 가득 찼네
♧ 수박씨 뱉는 오후 - 고경숙
놀이동산에서 알바하는 무섭씨가
분장을 해요
그가 하는 일은 귀신 옷을 입고
매일 여자 발목을 쥐었다 놓는 일,
그의 억센 손맛을 볼 때마다
소프라노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여자들은 대개
등 뒤에 따라오던 남자들에게
엉겁결에 안기곤 하지요
적잖은 나이에도
여자들이 무섭씨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심장에서 가장 먼 발목만
매일 잡는 탓이라고
그는 여긴답니다
깜깜한 귀신의 집
삐걱거리는 마루 밑에서
손을 뻗어 만지는
발목의 감촉,
가슴과 정반대로 피가 흐를 것 같은
그곳은
감정의 말단으로
사랑보다 항상 늦어요
이러다 평생 얼굴 없는 발목만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하면서도
보이지 않은 그녀들의
다리와 키와 얼굴을 상상하는 일은
어둠 속 한 줄기 빛이에요
무섭씨가 잠시 휴식하러 나왔어요
품 조이는 피 묻은 소복과 처녀가발이
땀으로 범벅된 채
시원한 수박 한 입 베어 물고
오물거리는 오후,
퇘, 퇘, 퇘……
귀신의 신통력으로
안 보아도 보이는
그만의 그녀를
운명처럼 만나면
가느다란 발목을 꽉 쥐고 안 놓을 거래요
소스라치지 않고 자신에게 안길
그런 아가씨 말이죠.
♧ 섬2 - 서동인
- 낭도
그 섬에는 여우가 산다
파랑주의보는 여우의 출몰 소식
섬의 내장을 뒤집어 놓은 소문이
배들의 닻을 끌어내리고
여우가 물어뜯은 빈 집 문짝들은
주인이 돌아올까 귀를 쫑끗 세운다
여우 발자국을 밟는
분교 아이들 겁 없는 웃음소리
여우 울음으로 둔갑해
사도, 적금도, 둔병도
저 멀리 조발도처럼 떠내려간다
방파제에 걸터앉은 등대는
밤새 흘린 불빛을 주워 모아
얼굴 가린 낮달에게 봉화를 피우고
밤새 여우 색시에게 홀린
낮술 취한 재봉이 아저씨
백사장 갯메꽃으로 드러누워
달이 뜨기만을 기다리는 섬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산다
♧ 효자리 별곡 2 - 문봉순
- 미영씨네 담벼락
흙벽에 새겨진 이름들
미영공주 하미영
하주영
하진희
하혜진
하준
하기호
앞집 담벼락에는 하미영씨네 형제자매 이름들이 이쁘게도 남아 있다.
명절이 되면
고향을 찾는 아주머니들 중
누가 미영씨일까 유심히 살피게 된다
♧ 입술의 일기 - 이자연
자취방에 엄마 왔다, 갔다.
따라서 오늘 아침은 김치 대신 김치찌개
엄마는 간을 보며 연방 숟가락에 묻은 입술을 찌개에 담궜을 거다.
그릇에 담긴
엄마 입술
을 떠 먹는다
200km를 사이에 두고 엄마와 장거리 뽀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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