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 함께 여기에’의 시

김창집 2013. 11. 26. 13:24

 

제주작가회의에서 발간하는 계간지 ‘제주작가’는

‘우리 함께 여기에’라는 작은 공간을 할애해서

회원이 아닌 분들의 개성 있는 작품들도 소개하고 있다.

 

이번 제주작가 가을호에는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섯 분의 시

10편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중에 각 1편씩 골라

늦가을 공중으로 날아오를 바람을 기다리고 있는

으아리 씨방과 같이 싣는다. 

 

 

 

♧ 빈 잔 - 김완하

 

정 선생 모친 장례식장에서

박 선생 소개로 만난 사람

엊그제 연로한 부친 묫자리 보러 가서

좋은 터 있기에 자기 것도 예약해 두었다며

 

그때 바로 옆자리 예약하는

자기 또래의 사내와도 인사 나누었다며

나중에 묘지 이웃으로 만날 사람이기에

굳게 악수도 나누었다며

 

처음 본 그가, 죽은 뒤에나

이웃으로 만날 그 사내였기에

점심에 서로 술 한 잔 따라주었다며

빈 잔에 소주 가득 따라놓았네

 

주변에 함께 앉은 사람들

껄껄껄 허공에 빈 잔 하나씩 채워두었네

어느 사이 상가는 온통 이웃을 위한

이웃의 빈 잔으로 가득 찼네

 

 

♧ 수박씨 뱉는 오후 - 고경숙

 

놀이동산에서 알바하는 무섭씨가

분장을 해요

그가 하는 일은 귀신 옷을 입고

매일 여자 발목을 쥐었다 놓는 일,

그의 억센 손맛을 볼 때마다

소프라노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여자들은 대개

등 뒤에 따라오던 남자들에게

엉겁결에 안기곤 하지요

 

적잖은 나이에도

여자들이 무섭씨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심장에서 가장 먼 발목만

매일 잡는 탓이라고

그는 여긴답니다

 

깜깜한 귀신의 집

삐걱거리는 마루 밑에서

손을 뻗어 만지는

발목의 감촉,

가슴과 정반대로 피가 흐를 것 같은

그곳은

감정의 말단으로

사랑보다 항상 늦어요

 

이러다 평생 얼굴 없는 발목만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하면서도

보이지 않은 그녀들의

다리와 키와 얼굴을 상상하는 일은

어둠 속 한 줄기 빛이에요

 

무섭씨가 잠시 휴식하러 나왔어요

 

품 조이는 피 묻은 소복과 처녀가발이

땀으로 범벅된 채

시원한 수박 한 입 베어 물고

오물거리는 오후,

 

퇘, 퇘, 퇘……

 

귀신의 신통력으로

안 보아도 보이는

그만의 그녀를

운명처럼 만나면

가느다란 발목을 꽉 쥐고 안 놓을 거래요

소스라치지 않고 자신에게 안길

그런 아가씨 말이죠. 

 

 

 

♧ 섬2 - 서동인

     - 낭도

 

그 섬에는 여우가 산다

파랑주의보는 여우의 출몰 소식

섬의 내장을 뒤집어 놓은 소문이

배들의 닻을 끌어내리고

여우가 물어뜯은 빈 집 문짝들은

주인이 돌아올까 귀를 쫑끗 세운다

여우 발자국을 밟는

분교 아이들 겁 없는 웃음소리

여우 울음으로 둔갑해

사도, 적금도, 둔병도

저 멀리 조발도처럼 떠내려간다

방파제에 걸터앉은 등대는

밤새 흘린 불빛을 주워 모아

얼굴 가린 낮달에게 봉화를 피우고

밤새 여우 색시에게 홀린

낮술 취한 재봉이 아저씨

백사장 갯메꽃으로 드러누워

달이 뜨기만을 기다리는 섬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산다 

 

 

♧ 효자리 별곡 2 - 문봉순

    - 미영씨네 담벼락

 

흙벽에 새겨진 이름들

미영공주 하미영

하주영

하진희

하혜진

하준

하기호

 

앞집 담벼락에는 하미영씨네 형제자매 이름들이 이쁘게도 남아 있다.

 

명절이 되면

고향을 찾는 아주머니들 중

누가 미영씨일까 유심히 살피게 된다 

 

 

 

♧ 입술의 일기 - 이자연

 

자취방에 엄마 왔다, 갔다.

 

따라서 오늘 아침은 김치 대신 김치찌개

엄마는 간을 보며 연방 숟가락에 묻은 입술을 찌개에 담궜을 거다.

그릇에 담긴

 

엄마 입술

 

을 떠 먹는다

200km를 사이에 두고 엄마와 장거리 뽀뽀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