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대설에 오른 우보악

김창집 2013. 12. 8. 00:05

 

중국 대륙에서 날아온

먼지도 말끔히 가셔버린 토요일

한라산 서남쪽에 자리한

우보악에 올랐습니다.

 

달력에는 대설(大雪)로

눈이 많이 오는 절기로 되어 있지만

한라산 정상만 희고

맑고 포근한 날이었습니다.

 

탁 트이고

포근한 풀밭이 있는

고향 뒷산 같이 나지막한 오름을

웅장한 한라산이 멀리서 지켜봅니다. 

 

 

♧ 겨울 추억 - 배종대

 

겨울 햇살 받쳐 들고

옛 추억 안아본다

 

누덕누덕 기운 검정바지

구멍이 난

‘보생 타이어표’ 검정 고무신 신고

담장아래 옹기종기 모여

연 날리던 아득한 날

 

얼어 터져 피가 나는

내 까만 손을

쇠죽 끓인 물로 씻겨주시던

늙어버린 누님 얼굴

 

지난날 들녘에서

갈 곳 찾다가 모여 있는

가랑잎을 태워 보아야지

 

타버리는

추억의 냄새를 맡으며

먼 하늘을 쳐다보아야지

 

겨울 속 봄 오기 전

언 손 호호 불며

어디 숨어버린 옛 추억 찾아-  

 

 

 

♧ 겨울산 - 김윤자

 

그렇게 등이 휘신 줄 몰랐습니다.

거칠어진 잔등에

그렇게 골이 깊게 패이신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봄 언덕 오르내리듯 마냥 좋아라

삼백 예순 날 질겅질겅

밟고 다닌 것 죄스럽습니다.

 

따스한 피가 흐르던 시절에

품안에 파고들던 산꿩도 산다람쥐도

제 둥지 틀어 떠나 가버린 동지섣달

서릿발같이 서걱이는 한숨만 스미는데

허연 달빛마저 은가마 타고 내려와

성긴 머리에 귀빈인 양

상석에 자리하시오면

초로의 설운 가슴, 어이하시란 말입니까.

 

가을이 으스러진 자리

다 찢긴 베적삼, 잠방이 구겨 깔으시고

등걸잠으로 누우시니

낙조에 걸린 산그늘이

허리를 휘휘 감아

쓰러져 굳어진 장승인 듯 보입니다.

 

매화 꽃송이 같은 노래 깔아드리면 일어나실까

언 입 옹알이며 종일 속삭여드려도

복숭아 속살 같은 옛 얘기 펼쳐드리면 웃으실까

언 손 내저으며 종일 재롱을 떨어도

쩍쩍 갈라진 살점 사이로 아픔만 토해내실 뿐

바위보다 무거운 표정 그대로이십니다. 

 

 

♧ 또 다시 겨울이 오다 - 남민옥

 

떠나지 못한 잎새 하나

지난 계절의 추억처럼

마른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다

 

스산한 마음 닮은 바람 한 점

허공에 집을 짓는다

 

푸드득 겨울새 한 마리 날아든다

새들의 안부를 묻는다

세상 모든 이들의 안부를 묻는다

 

움츠린 사람들의 모습

짧아진 햇빛도 위태롭다

 

꿈속에선 꽃들이 피고 지는데

첫서리 내린 뜨락에

꽃들의 그림자 짙다

 

겨울엔 존재하는 것 모두 메마른 소리를 낸다

너, 나, 우리 모두

따뜻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 중년의 겨울 - 최홍윤

 

한세상 살아오면서

가슴 아픈 일, 눈물 나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든가

목숨을 깊은 흙 속에 묻어두고

바람의 입맛에 나부끼다

발가벗은 나목처럼

흔들리며 말없이 사는 거다

 

소리 없이 뜨거운 불길로

내 가슴을 태우던 빛 고운 단풍잎도

까칠하게 바삭이는데,

얼어붙은 겨울이라고

나무들처럼 올곧게 왜 못살겠는가

사노라면 가슴 상하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 겨울연가(戀歌) - 이혜정

 

침묵을 깨고

환한 웃음으로 달음질하던 햇살이

야윈 나뭇가지마다

긴 그림자로 남겨질 즈음엔

그 어떤 하루의 일상일지라도

커피한잔 나눌 수 있는 고즈넉한 풍경이 된다

 

가녀린 너의 손 끝

빗장 걸려 닫힌 생각 열어주고

가슴 설레게 뛰는 심장소리는

외로운 고독을 일깨우며

명치 끝 툭툭 치며 누군가 부르는 손짓은

수없이 당금질하던 그리움 꺼내는 손끝이 된다

 

어두움을 벗 삼아 누워버린 하루는

굽은 등 훑고 지나는 바람소리 되어

지난 가을이야기 흔드는 마른기침으로 찾아들고

남몰래 간직한 사랑이야기는

별빛에 걸어도 좋을 연가(戀歌)되어

그대 이름 부르고픈 길고 긴 기다림 되리라.  

 

 

♧ 겨울의 길목에서 - (宵火)고은영

 

싸늘한 기후와 애환이 겹친

계절은 나보다 더 우울하네

뭉턱뭉턱 무너져 내리네

바람이 희롱 하는 대로 휩쓸리거나

아래로 하강하는 것들의 서러움

모든 인연은 눈물나게 야속하구나

 

속 끊이는 시간에도 계절은

겨울 행 열차를 타고 멈추거나 정차하지 않고

그대로 질주하는 암울

쨍쨍한 햇살이 비치든가 바람이 불던가

아무래도 가을은

그 뜨거웠던 사랑의 비음을 쏟아내는 소각장 같다

 

어쩌면 낙엽들은 눈을 감고

마지막 고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확 불을 당기면 형체도 남지 않고 타올라

사라질 것 같은 메마르고 미약한 숨소리로

지상을 덮고 있다

 

재가 되어 낱낱이 까발려 질 청춘의 연애 사가

이별로 가볍게 날아오를 이 가을의 정거장에는

젊은 애인들이 멀어져 갔고

늙은 애인도 은근한 아듀 속에 멀어지려 한다

저만치 아쉽게도 멀어져 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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