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산책길에서 본 돌탑

김창집 2013. 12. 9. 00:28

 

일요일,

오름 식구 다섯이서

따뜻한 서귀포로 가서

호근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중산간보다 더 위쪽

산록도로에서 시작되는 이 숲길은

때죽나무, 산벚나무, 서어나무 같은 잎이 진 나무들과

붉가시나무, 참식나무, 생달나무 같은 잎이 지지 않는 나무들이

섞이어 호젓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습니다.

 

더러는 나무 공부를 하고,

잠깐씩 지난 1년을 돌아보기도 하며

시오름 정상까지 다녀왔습니다.

쉼터에는 평상과 나무의자들이 모여 있고

숲속의 도서관, 조그만 새마을문고도 갖춰 놓았습니다.

 

그런데 중간중간에 이런 돌탑들이

나타나서 나에게 말을 겁니다.

누군가가 조그만 기원을 담고 쌓았을,

제주 현무암, 기묘한 화산암의 탑들….

그 속에 담긴 내용을 생각해 봅니다. 

 

 

♧ 아름다운 산책 - 이남일

 

단풍 길 노부부가

서로의 마음을 따라갑니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며

무심코 걷는 속도만큼이나

허전한 시간을 맞추어 갑니다.

 

채워주지 못한 것과

아직도 채워야할 일들을

고백하면서

눈으로 서로를 다독입니다.

 

서로를 위한 걱정을

마음으로 선물하면서

지금껏 꼭 잡아주는 손길에

한없이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 산책길에서 - 정완영

 

가을이 떠난 후론 들녘도 몸져눕고

황량이 하늘 아래 바다보다 저문 날은

하나 둘 먼 마을 집들만 돛배처럼 떠오른다

 

강둑길 눈발자국 새벽빛을 밟고 가면

설친 잠 먼 마을 집 꺼지잖은 등불들이

이미 저 세월의 가지 끝, 봄을 부른 매화 같다

 

편안한 아침 안개 징검다리 가는 농부

이승길 떠날 때도 저랬으면 참 좋겠다

물 건너 저세상 같은, 산마을도 꿈속 같은  

 

 

 

♧ 산책길에서 - 유소례

 

찔레나무 마른 씨줄에

볼록볼록 심어놓은 부활의 날줄

 

연초록 날줄 잣아 내

씨줄의 살을 덮는 옷 속으로

기어든 바람의 입술이

시린 입맞춤을 하는구나

 

씨줄의 꺾어질 듯 휘어진 등허리에

그의 유전자 싹을 배태하고

생살 찌르는 지난 계절의 송곳바람에도

굳은 심장 행여 터질세라

밤새워 그르렁대며 견디어 온 혈관

 

이른 봄 햇빛 아래 산실을 지어 놓고

얼어붙은 저혈압의 피를 데우며

쏟아낸 아가의 살에 실꾸리로 새파랗게

옷올 짜 덮고 있구나.  

 

 

♧ 산책 - 이민정

 

숲길에는 세상에 없는 고요가 있다.

새들의 오붓한 수다와

낮은 풀과

여린 꽃들의

호젓한 일상은

시꺼먼 아스팔트 위에서

바알갛게 익은 내 이기심을

아프지 않게 다독이며 식혀주는

재활의 기운이다.

숲길에는 세상에 없는 위로가 있다.

평화가 있다.  

 

 

♧ 십이월 산책 - 황동규

 

쥐똥나무 울타리 밑에서 주워든

얼어 죽은 참새의 별난 가벼움,

빈 뜰에서 싸락눈 맞고 있던

철없이 핀 장미의 전신 추위,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여자의 살짝 들린 둔부

를 내리누르던 흑바위 같던 얼굴의 어둠,

이들 때문에 하루를 흐리게 한 죄 없느냐 묻는다면,

물으시는 분과 함께 골목길을 오르겠습니다.

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물건만 잔뜩 문밖에 내논 쓸쓸한 가게들을 지나

힘없이 싸우고 있는 두 여자를 지나

줄기는 말랐어도 늙은 호박 하나 늠름히 앉아 있던

지금은 비어 있는 슬래브 대문지붕을 지나

시든 줄기 두셋 꽂고 잠든 꽃자리들을 지나

쥐똥나무 울타리까지 가겠습니다.

없는 것보다는 그래도 있는 것이 설레게 하는군요.

쥐똥나무에는 여태 까만 열매를 달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 산책 - 조기조

 

  평일날 출근 시간대의 일요일 공단로 산책은 고요하고 푸르다 이제 목련도 지고 장미가 피었구나 바쁠 필요도 없이 빵빵거리는 차들을 신경 쓸 필요 없이 아 저 공장은 이번에 6.7%라지 담배라도 한 개비 꼬나물고 잘되면 팔자걸음도 좋게 슬슬 걷는 길은 저기는 조합원이 반도 못되게 줄었다지 일주일 묵은 피로를 싸악 씻어준다 저기는 이번에 노총 탈퇴를 하고 사실 이제 모두들 힘든 것에 이골이 났다 저 꼴도 보기 싫은 공장은 3년째 공장 문을 닫고 있지 조금만 버티면 아니 조금만 더 아 저기 위원장 김이 아들을 봤다지 힘들여 싸우면 된다 내년은 올해보다 더 상황이 좋아질 게 틀림없다 이렇게 한두 시간 텅 빈 공단로를 걷노라면 초여름 빗물에 씻긴 느낌이 그래 흐흐 가로수 이파리처럼 싱그러워지는 사색 내일 아침이면 공단로 푸른 혈관에 가득 출렁일 당신에게도 일요일 아침 공단로 산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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