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다시올 문학의 시

김창집 2014. 1. 24. 17:00

 

‘다시올 문학’ 2013년 겨울호의

시를 읽다.

 

지난번에도 더러 읽고

몇 편 뽑아 올렸는데 반응이 좋았다.

 

같이 올리는 꽃은

요즘 한창 온실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양란이다. 

 

 

 백두산 천지만 아는 일 - 김금용

 

귀에 익은 늑대 울음소리가 올라온다

정월 대보름 차게 맑게 씻은 보름달이

긴 혀를 내밀어 백두산을 핥는다

겨우내 눈에 갇혀있던 산이 출렁인다

목울대까지 올라오는 뜨거움에

홀로 눈사태가 난다

천지 오르는 너른 바위 등짝에 뿌리를 박은

키 작은 나무 한 그루,

달빛을 가지마다 구슬로 꿰어

바위 목에 감아주며 사랑을 속삭인다

보름달 닮은 새끼 하나 잉태하자고,

 

천 년 만 년 꼼짝 않던 너럭바위가

깊이 파고드는 소나무 뿌리에 놀라

한 귀퉁이 부서져 굴러 떨어진다

 

이 사철나무와 바위의 정사에

보름달까지 삼각관계였다는 건

바위를 품에 안은

백두산만 아는 일이다  

 

 

♧ 스멀거리는 기억 앞에서 - 안갑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연과 끝도 없이 늘어선 사연들이

단두대 앞에서 뇌세포 칼춤에

단어가 자음과 모음으로 산산이 베어져 쓰러지고

당신도 그 안에서 잊혀 가네

초콜릿 같은 달콤했던 청춘은 상처도 맛있었는데

요즘은 긁힌 자국도 아픔을 느끼고 잘 아물지 않네

조합되지 못하는 이름과

길 잃은 전화번호들이 바스락거리며 뒹굴다가도

줄기차게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기억도 가네

벌떡 일어나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싶은 그 날이여

당신이 내 기억의 주인공이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오늘은 어디선가 본 듯한 타인이 되었구려

모진 태풍에 부러지는 나무보다

세풍에 산산이 날리오며 공백이 되어가는 기억 때문에

당신 안부를 묻지 못한다 해도 용서해 주오

지금은 받침 하나라도 겨우 잡고 버티며 애쓰는 중이라네

 

 

♧ 그리운 사람 - 송동현

 

  마른 바람 잘게 쪼개 나눠 맞던 가지들 빗방울을 나누며 피워낸 시간 하얗다

  떨어지는 순간이 가장 예쁘다는 벚꽃보다 노란 담장을 만드는 개나리가 가슴으로 더 깊이 들어오는 것은 여럿이 모일수록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죽어서 더 그리운 사람 있으니 살아 숨쉬는 자들이여 뿌리부터 빨아올린 생명을 저 하늘 태양까지 흩뿌려라

 

  시의 조각들 모아   

 

 

♧ 어안을 읽다 - 이운룡

 

  오른 눈 망막 출혈 수술 후 갑자기 사람의 늙음이 환해졌다. 벽지가 왼눈은 누렇게 보이고 오른 눈은 하얗게 보인다. 눈이 맑아지니 헌것은 헌것이고 새것은 새것이구나.

 

  손님의 가장자리에 해진 시간이 많이도 번져 있다. 엊그제의 싱싱한 시간이 언제 금이 가 있었나? 나의 어둠에 묻혀 안 보였던 것들이 이제야 제대로 보인다.

 

  겸상의 아내 얼굴에도 거미줄처럼 늙음이 사방팔방 뻗어나 있다. 날마다 본 시간의 빗금들을 이리저리 짜 맞추어 보아도 골이 깊어서 어긋나고 만다. 그 동안의 혹사가 얼마나 지독했을까? 측은한 생각이 눈을 찌른다.

 

  키 큰 벽거울을 들여다본다. 한 뼘쯤 작아진 늙음이 어둡게 밀어닥친다. 맑은 물에서 못 사는 물고기 심정을 이제 읽을 나이가 되었나 보다. 세월의 눈 귀 입을 진흙으로 척척 발라야 할 이치가 눈이 맑으니 잘도 보인다. 

 

 

 

♧ 유쾌한 반란 - 신현복

 

  ‘한 시골초등학교에 경사가 났다. 신입생 예비소집을 해보니 29명이 등록했다. 여느 도심학교와는 비교도 안 되지만 작년 9명에 비해 3배가 늘었다. (중략) 꾸준히 실천해 온 체험 ․ 인성교육의 결실이다. 폐교 직전까지 몰렸던 시골 초등학교의 유쾌한 반란이다. - 기자-’

 

  좋겠다 체육시간 이젠 축구도 편 나눠 할 수 있어 정말 좋겠다. 교체할 후보도 있고 주전자 담당에 한둘쯤은 끼병 부려도 상관없고, 난 산소탱크 박지성 아니냐 내가 박지성 그래 그럼 난 이청용 수비부터 최전방 공격까지 서로 고집도 부려보고 양보도 해보고, 하다보면 공 쫓아 뒤죽박죽되겠지만 반칙이다 아니다 땡깡도 부려보고 멋쩍게 인정도 해보고 이청용처럼 드리볼 유연하게 박지성처럼 세레머니 근사하게, 정강이 차여보고 슬쩍 차보기도 하고 넘어뜨리고 일으켜주고 핏대도 높였다가 다시 씨익 악수 권하고 물 마실 땐 네편 내편 따로 없는, 더불어 유쾌한 반란(班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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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란(班爛) : 여러 빛깔이 섞여서 아름답게 빛남 

 

 

♧ 최근의 시식용 공식 - 추종욱

 

내 아름다운 생의 수식들을 조금씩 씹어 넘긴다

꼬불꼬불한 소장과 대장을 지나

하루하루의 수식을 풀어 쓰고 소화시킨다

공식의 내장을 씹는 맛이 좋다

그래서 나의 공식들이 전부 소화될 때까지

세상은 순환소수 같은 운명이다

해마다 새것 같은 계절이 오고

좁고 가파른 식도를 따라가다 보면

사랑도 죽음도 첫 수식들인 것 같아서

아직 모든 상징이 소화가 되지 않아

내 몸은 부지런히 풀어 갈 수밖에 없는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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