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도 지나쳐버린
어제 산행
대천이오름으로 들어가는 냇가에서
본
털괭이눈,
권경업 시집
‘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을 펼쳐
시 몇 편 골라
같이 내보낸다.
♧ 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
성스럽다며, 핑그르르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돌아
뜨겁게 달아오른 이들
숱하게 몸 바치고 목숨 바치게 한
푸른 하늘 솟대 끝의 깃발도 펄럭이지 않는다면
아무도 우러러보지 않습니다
하물며 나부끼는 깃발도 그렇거늘
어디, 바람 없이 꽃이 핍디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스러지면서도 눈길 땡기고
흩어지면서도 분분히 눈길 쓸고 가는 것은
바람이 꽃을 피운 때문입니다
바람 없는데 향기는 왜 품겠으며
바람 없다는 말, 천지간에 꽃 한 송이 피지 않는
삭막하다는 뜻인데도, ‘그까짓
바람 좀 피운 일’이라시면
세상에, 무슨 일로 향기 번지며
바람 앞에 떨면서 그 숱한 꽃들은 피고 지겠습니까?
바람은 피우는 것입니다, 꽃처럼
들고 날 일 없는 적적한 포구(浦口)
돛을 올리고 닻을 감아야 할
내 작은 돛단배의 하얀 깃폭도
바람 앞에 떨면서, 떨면서
가슴 한껏 부풀리고 싶은 것
꽃을 피우는 바람처럼
함께 가자고, 모두들 손에 손잡고
봄바람이 되어 가자고
바람이 붑니다, 꽃이 핍니다
봄날이 갑니다, 꽃이 집니다
♧ 봄바람
간지럽다며 강물은
여린 살결 뒤척입니다
‘간질이지마, 간질이지마’
겨우내 꽁꽁 품어두었던
뽀얀 가슴, 키득키득
봄바람 앞에 간지럽습니다
♧ 당신은 누구십니까
누구십니까
혹여 키 낮은 풀꽃 아닐런지요
겨우내 아린 꽃물 품어
보아줄 이 있건 없건
조그만 꽃부리 애써 여는 당신은
세상의 아름다움 위해서입니다
소리 낮추어 피는 감자난초 족두리풀
듣기에도 어색한 개불알꽃 고슴도치풀
이름 한 번 불릴 일 쉽지 않은 이 땅에
말 없는 노랑제비꽃
연보라 노루귀, 꿩의바람꽃
천덕꾸러기 엉겅퀴 들꽃이라도
세상의 아름다움 위해서입니다
무심히 스치는 길섶, 하찮다지만
먼지만한 씨앗으로 세상에 오던 날
하늘에는 바람, 땅에는 비 내렸습니다
척박한 땅 싹 틔워 질긴 뿌리 내리라는
그 가르침
당신은 누구십니까
♧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가버린 봄은
돌아와 다시 꽃 피운다지만
떠나간 그대는,
다시
오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두고 떠날 때
말하진 않았어도
오죽 했을 그 마음
기꺼이 멀어져
그리움 되어준
내 삶의 소중한 한사람이여
그대와의 인연
다했다는 걸 알면서도
저 윤중로 벚꽃 봄비에
다 지도록
나는 기다립니다.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지는 꽃그늘의 쓸쓸함과
세상 숱한 설움의
견딜 수 있는
힘이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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