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 3월호가 나왔다. 권두시는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권두 에세이’는 나병춘의 ‘거기 그곳에서 사람을 만났네’이다. ‘신작시 22인 選’은 이생진 임보 정순영 이무원 김두환 복효근 박정원 한옥순 김세형 채들 조경진 김현욱 박승민 이상렬 이수미 이동훈 김봉구 민구식 최라라 성숙옥 조율 김숙의 시를 올렸다.
‘시지 속 작은 시집’은 채영선의 ‘보릿자루’외 7편을 올리고 임채우의 해설을, ‘테마가 있는 소시집’은 박승류의 ‘꼬리’외 9편을 시작노트와 함께, ‘시인이 읽는 시’는 이종암의 ‘삼월의 하늘, 거기로 건너온 꽃을 노래하다’를, ‘한시한담’은 조영임의 ‘태교신기를 저술한 여군자 사주당 이씨’를, 양선규의 「인문학 스프」는 ‘주워온 자식, 데려온 자식’을 실었다.
시를 읽고 몇 편을 골라
새하얀 광대나물꽃과 함께 올린다.
♧ 어린애처럼 카톡이 좋다 - 이생진
어느날 병실에 있다는 독자에게서
카카오톡이 왔다
‘병실인데요,
할머니에게 읽어드릴 시를 추천해 주세요’
그래서 시바타 도요 할머니의 ‘약해지지 마’에서 시 한 편 꺼내줬더니
병석에 누워 시 읽는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야학에서 한글을 배운 실력으로 시 읽는다는 할머니
‘아흔다섯
나를 시작으로
아흔넷, 여든아홉, 여든여섯
여자 넷이 머무는 병실’*
이렇게 시작하는 시바타 도요 할머니의 시를
세상에 태어나 처음 시를 읽어본다는 할머니가
보기 좋아
원추리꽃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준다
독자를 이렇게 만나기는 처음이지만
시를 쉽게 써서
쉽게 전하고
쉽게 읽고
쉽게 감동하는 소식을 들으니
나도 어린애처럼 카톡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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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지지 마』(시바타 도요 지음/채숙향 옮김. 지식여행. 2010) 52쪽에서 옮김
♧ 가지 마셔요 가면 먹혀요 - 임보
내가 좋아하는 후배를
내가 사랑하는 제자를
얼마 전 그놈에게 빼앗겼습니다
빈둥빈둥 세상을 에돌던 사람들이
코끼리처럼 순한 그와 더불어
몇 개월 떠돌다 보면
코가 꿰인 소처럼 되어 돌아옵니다
돌아온 후배는 승가대학으로
또 제자 녀석은 해인사로 들어갔지요
그리고 무얼 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이 묘연합니다
나도 한때 얼마나 그놈을 그리워했는지
갠지스 강변이며
타지마할의 궁전이며
눈과 코가 큰 가무잡잡한 여인들이며
그놈이 누구인지 눈치 채셨나요?
네, 맞습니다. 인도라는 땅입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놈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나마저 코가 꿰어 돌아오면
세상이 얼마나 휘청거리겠습니까?
가지 마셔요
가면 빠져요
사랑하는 사람아
가지 마셔요
가면 먹혀요
♧ 빛의 목소리 - 정순영
어스름이 내리는
추수의 들판에서
다투는
교만한 바람이여
게으른 자여
잠을 깨라
아픔 다음이
해맑은 영혼
홀연히 데려가는
길 위에
저 시리도록 눈부신
빛의 목소리
어둠 위에
밝음으로 부서지네.
♧ 수녀와 비구니 - 이무원
얼굴이 발그레한 수녀님과
비구니 한 분이
초겨울
나란히 담에 기대여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한 분이
매화꽃 속에 잠시 날개를 접은
바람같이
자기의 소원을 조용히 말하자
또 한 분이
맞장구를 쳤다
“저두요,
꼭 갖구 싶어요”
♧ 끈 - 복효근
내가 갑자기 어두워져
올려다보니
백로 한 마리 날아가며
그 그림자가 나를 지나는 중
해와
새와
내가 나란히 한 줄로 이어져
또 먼 별에도 이어져
우주에로 이어져
내가 영원에 닿아있다는
구체적 증거가 방금
다녀갔다니
죽어도 내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가
이렇게 다녀갔다니
♧ 어디로 가는 걸까 - 조경진
지렁이가 출가를 하나 보다
사막 같은 보도블록 위를
맨몸 배밀이로 고행의 길을 간다
지나온 자국은 벌써 바람이 지우고
배행陪行의 슬픔처럼
구도자의 결연한 의지처럼
어디로 가는 걸까
햇볕에 말랑한 피부가 타들어가도
가는 길은 오직 하나인 듯
무아경에 든 듯
곁눈질 않고 뒤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먹먹해지고
측은함에 가슴 쓸다가
해거름 길에 지렁이가 궁금하다
아파트 입구부터 발끝에 눈길을 모으는데
아뿔싸! 보도블록 위에 쭈그러든 몸
개미 장례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그는 어디로 가려 했을까
조용히 소멸할 성소聖所를 찾은 걸까
코끼리도 생을 마감할 땐 무리를 떠난다고 했는데
마지막 몸을 맡길 수 있는 곳이 여기냐고
먼 산을 바라보는 사이
미화원의 빗자루가 흔적마저 쓸고 갔다.
♧ 쇠소깍에서 - 이상렬
민물과 바닷물이 차별을 버리고
하나 되어 생이 다시 시작되는 곳
그 위에 기대어
생전의 그대들과 사진을 주고 받는다.
구분 없이 하나 되는 인연도
함께 없어지는 곳
그래서
뒤돌아보고 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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