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 4월호가 나왔다. 권두시 박목월의 ‘4월의 노래’로 시작되는 이 시지(詩誌)는 ‘권두 에세이’로 이범철의 ‘따뜻한 시詩’, ‘신작시 21인 選’은 김석규 홍해리 나병춘 윤석주 김청광 서동인 권순자 마경덕 박은우 손창기 유현숙 정하해 장성호 김말화이재부 박홍 전홍규 한문수 김영란 나온동희 채영선의 시로 꾸몄다.
‘詩誌 속 작은 시집’은 오명헌의 ‘안개’ 외 7편을 임채우의 해설로, ‘테마가 있는 소시집’은 채들의 ‘개복숭아’ 외 9편을 시작노트와 함께 실었다. ‘시인의 읽는 시’는 나병춘의 ‘현실 일탈의 소풍 같은 통로, 시詩’, 고성만의 ‘봄을 맞이하는 시인의 자세’, 한시한담은 조영임의 ‘주역과 거문고에 능통했던 통섭의 시인, 서계 이득윤’, 양선규의「인문학 스프」는 ‘아직도 비밀이 : 인정투쟁’, 수필 산책은 한판암의 ‘고희의 언저리’가 실렸다.
시를 읽고 몇 편을 골라
동양란 전시회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올린다.
♧ 4월의 노래 - 박목월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 우수 사냥 - 김석규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꽃 어느새 향기마저 시들어 버렸을 때
시간 속에 빛나던 것들 마지막 영구차로 실어보낼 때
여름의 무성한 풀 건초다발로 묶어 헛간에 포개질 때
폭염을 가려주던 가로수 잎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밟힐 때
한낮의 눈부신 물상들이 짙은 안개 속으로 하나씩 사라져 갈 때
우연히 낯선 거리에서 만난 친구의 머리가 백발로 덮였을 때
홀로 잠 깨어 한밤을 건너가는 둔탁한 괘종시계 소리를 들을 때.
♧ 입춘 추위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 2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봅니다
어디 가고 싶냐 물어도
묵묵부답
조금 있다 또 문을 엽니다
밖에 나가고 싶냐 물어도
그냥 웃습니다
또 문을 열고 치어다봅니다
누굴 기다리느냐 물어 봐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또 다시 문을 열고 쳐다봅니다
속이 답답하냐 물어도
하늘만 바라보다 문을 닫습니다
입춘날 날씨 매섭게 찬데
어찌 봄이 오겠습니까?
문을 열면 칼바람만
제 세상인 듯 쩡쩡하니 밀려듭니다.
♧ 간월호 - 나병춘
간월호 잔물결
비오리 청둥오리
빈 배엔 남정네
휘파람 노 젓는데
하늘에 뜬
소리개
새털구름 속
몰래 숨고
기러기 떼 웬 시 한 줄
저녁놀 우련 붉어라
짭쪼롬한 파도소리
호사비오리 청둥오리
♧ 장마주의보 - 윤석주
- 山中日記 20
이끼만 속절없이 푸른
빈집 마당에 숙우宿雨 하염없다
땡볕에 뼈골 삭은 슬레이트지붕
그 야원 볼을 타고
탄식같이 흐르는 빗물.
동방사니 질경이 강아지풀
하 많은 잡초 속 슬픔 하얗게 베어 문
개망초 젖고 젖으며 울고 있다
생生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그것도 모르면서 민달팽이 한 마리
정글 같은 마당 느릿느릿 기어간다.
♧ 폭설 - 권순자
그리움이 쏟아진다
진저리치는 어제의 기억들이
뭉텅뭉텅 쏟아진다
아득한 길
무거워진 사랑을
홀연히 떨어내는 뜨거운 눈물.
어두워진 겨울 모퉁이
하얗게 젖어간다
♧ 안개 - 오명헌
날씨가 풀리고 졸가리들은
봄똥 누듯 힘을 쓰고 있었다
뿜어져 나온 김들은
움직이는 것들을 결박했다, 세상을 평정했다
고비사막에서 날아드는 묵은 편지들은
수취인을 찾지 못해 쩔쩔맸다
통 수만큼이나 많고도 짙은 사연 탓인지
아무데나 마구 분칠을 해댔다
단단하게 어우러진 그들의 내막을
캐낼 수 없었다
미몽에서 깨어나는 일에도
힘깨나 써야 할 판이었다
♧ 개복숭아 - 채들
창틈으로 통하는 어린 눈동자에서 흰 살이 울었다.
새순을 도려내는 수술실에서
울컥울컥 쏟아내는 핏덩어리
개복숭아나무 그늘이 삼키고
봄마다 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소문처럼 흩날렸다
나무를 타고 놀던 아이들은 습관처럼
개복숭아를 따 한 입 베어 물어보고는
풋, 그늘에 내던졌다
아, 먹어본 적 없는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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