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지리산을 생각하며

김창집 2014. 6. 3. 17:06

 

지리산엘 다녀온 지도 어언 보름이 지나버렸다.

생각 같아선 일찍 답사기를 써 올리려 했으나

무엇에 쫓기는지 잘 되지 않는다.

 

오랜만에 사진을 정리하며 몇 장 뽑아

지리산과 더불어 생각나는 권경업 시인의

시와 함께 올려본다. 

 

 

♧ 일어서는 산

 

해 저물어 땅거미 지면

여기저기 산 무너지는 소리

그 소리에 짙어지는 어둠 따라

산은 형체없이 무너진다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이

되받아 무너지고

이웃 산은

밤새워 통곡하다

더불어 무너진다

 

해 돋는 아침 그러나

여기저기 산 일어나는 소리 들린다

골짜기가 밝아짐에 따라

더욱 높게 들린다

한 산이 일어서면 다른 산이

잡고 일어서고

밝은 아침 환희에 찬 백두대간이 일어선다 

 

 

♧ 노루목

 

너가

이 땅에 소유한 것이라곤

오름짓의 로프 한 동과

조금은 낡았어도

사랑과 우정 짊어지기에

부족치 않던

붉은 배낭 하나

 

소박한 꿈 거짓 없었음에도

마지막 속초나들이

노루목 돌아들면

한줌의 뽀얀 언어로 침묵하면서

뜨겁게 마시자던 경월

휘휘 저어 사양하고

꼭 한번은 가야할 길

달마봉 올라가는 골바람따라

훌훌 털고 따라나서네

너 흩어지는 모습 뒤로

“이 잔이나 들고 가소”

“이 잔이나 들고 가소”

 

애타는 악우들의 소리 들릴까마는 

 

 

♧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熱目魚)였나보다

 

삶에 어찌 제 속내를 다 드러내며 살까

앞앞이 못한 이야기 풍편에 떠도는

바람의 여울목 쑥밭재에 서면 눈물이 난다

신밭골 약초 캐던 외팔이 하씨도

늘 젖어 시린 가슴, 어쩌다 해거름에

남몰래 꺼내 말리다 보면

설운 마음에도 노을은 뜨거워 눈물은 났으리라

 

세상을 뜨겁게 바라보는 이

보이는 모든 것이 뜨거운 이

그리하여 뜨거워진 눈을 찬 눈물로 식혀야 한다면

전생에 그대도, 아마

차고 맑은 물에 눈을 식히던 열목어였나 보다

유정(有情)한 시인아! 생명주처럼 풀린 강물

흔들리는 청솔가지에도 눈물이 나고

저무는 멧부리에 걸린 조각구름에도 눈물이 난다

 

아!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였나 보다 

 

 

♧ 아름다움의 완성인, 사랑도 산길 같아서

 

지리산 천왕봉

당신에게 다가가는, 중산리

가까운 길과 빠른 길 있다 하더라도, 저는

휘돌고 굽도는 취밭목 길로 가겠습니다

개여울도 건너고 벼랑길도 기어올라

아득하던 당신 앞에 섰을 때

땀내 젖은 온몸 핥듯이 씻어 줄

청솔바람이라는

당신의 숨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의 완성인,

사랑도 산길 같아서

빠른 것이 결코 척도는 아니겠지요 

 

 

♧ 처녀항해

 

맑던 하늘에 마른번개와 천둥이 치고

고요하던 뱃길에 풍랑이 일었다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이력이 난 뱃사람들은 담담했지만

처녀항해의 나는 심한 멀미를 앓았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길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소용돌이치는 너 속에서, 그것은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너를 극복하리라 애써보지만

그럴수록 더욱 휩쓸리고

그렇게 세상 처음 너를 만났다

 

자신이 경험 무용담으로 늘어놓는

노련한 선원들은, 히죽거리며 놀려댔지만

나는 내 속을 다 게워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언젠가 나도 저들처럼

풍랑 앞에 담담해지는 날이 있으리 

 

 

♧ 봄은 소리다, 누군가의

 

봄은 소리다, 누군가의

거칠어진 마음에 새순 돋는 소리다

 

어쩌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눈 감고서도 훤한, 취밭목

잔설 위로 오솔길 피어 오르는 소리다

 

아직도 못다한, 한 시절

발그랗게 얼굴 달아오르는 소리다

 

여리디 여린 그 품에

얼레지, 제비꽃 꽃망울이

꽃샘바람에 터지는 소리다

 

귓바퀴 손 모아 다가가는

내 가슴 콩닥거리는 소리다

 

 

 

'디카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합으로 피는 당신  (0) 2014.06.12
제주커피농장의 커피나무  (0) 2014.06.11
6월에 보내는 금강애기나리  (0) 2014.06.02
지리산의 늦은 봄꽃들  (0) 2014.05.28
섬초롱꽃 저리 고우면  (0) 2014.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