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도 내보냈지만 ‘잠수/ 잠녀/ 제주해녀 그리고 우리’라는 제주작가회의 여성모임 자청비 작품집의 시를 다시 추려 동백꽃과 같이 내보낸다. 이 책에는 회원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제주대표문인의 제주해녀 작품을 같이 실었다. 다음은 속표지에 실린 내용이다.
우리는 그 누구로부터도 문학을 하라고 종용받지 않았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생각을, 삶을 문학의 여러 장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는 자청비가 그랬듯이 자원하여 문학의 길을 가기로 생의 큰 목표를 정하였다. 우리는 제주 섬의 원형 자청비 ‘제주해녀’를 잇는 ‘또 하나의 자청비 제주해녀’이다.
- 제주작가회의 여성모임 자청비
* 나의 고등학교 시절, 여름이 되면 공휴일에 시간을 내어 친구들과 작살을 들고 물속에 들어가길 즐겼다. 그때만 해도 바다는 오염되지 않아 해초들이 용궁을 연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숲을 이루었다. 그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몸에 힘을 빼고 자유롭게 유영하면서 어린 고기들의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그 평화를 깨는 커다란 고기가 출몰하면 그 고기를 쫓아 기어이 작살을 꽂고야 말았다.
허리에 찬 꿰미가 묵직할 무렵이면 어느덧 깊은 바다에 이르고, 누나와 삼촌들의 작업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다섯 길 정도 이상 되는 바다 속은 그대로 정적의 세계다. 그 정적을 깨뜨리며 숨을 참고 들어가 돌을 들추고 두 손 가득 소라를 따고 올라오길 반복하는 모습을 기대하지만, 한두 개가 고작이고 빈손으로 올라오는 때도 많았다.
가끔은 나도 따라 들어가 본다. 부력(浮力) 때문에 단숨에 들어가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고, 눈과 귀를 통해 머리로 전해오는 압력(壓力)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돌을 들추고 살펴보기도 전에 숨이 막혀 꼭 죽을 것 같아 바닥을 박차고 올라올 때 그 시간의 지루함이란…. 지금처럼 납덩이도 아니 달고 들어가려면, 들어갈 때 다리를 뻗쳐 입수의 힘을 얻고, 나름 숨을 찾는 요령을 터득해 작업 시간을 연장하는 것이다.
지금이사 고무로 만든 잠수복을 입어 추위에도 견딜 수 있지마는 그때는 소중이만 입었기 때문에 여름이라지만 두세 시간 이상 작업하는 걸 보고 놀랐다. 우리는 한 시간 정도 물에 있다가 나오면 입술이 새파래지고 닭살이 돋아서 한참 동안이나 여름 햇볕에 그을려야 원상태가 되곤 했다. 우리 어머니들은 빈약한 가계를 꾸리기 위해 숨이 턱턱 막히고 머리가 바숴질 것 같은 물속을 칠성판을 지고 드나들었으리라.
♧ 서귀포 이야기 - 한희정
1
서귀포,
이름만 들어도
가슴엔 파도가 치네.
바다 속 풀어헤친
상군해녀 이야기처럼
저만치 패랭이꽃이
추억처럼 피어나.
2
“이어도
이어도 사나”
미역밭을 건너와서
열 길 물 속
저승길
절로 드는 숨비소리
만삭의 칠십 리 바다가
눈에 가득
고이네.
♧ 섬들의 꿈 - 김순남
섬은 바다의 향기로
잠들고
바다는 섬의 꽃으로 잠을 깬다.
섬은 수평선에 목을 메고
바다는 섬에 엎드려 비로소 몸을 푼다.
섬은 한 번도 그립다 말한 적 없다
바다가 제 멋에 파도를 일으키고
수평선을 그린다.
섬은 한 번도 갇힌 적 없었다
바다가 섬을 가둔 적도 없었다.
섬과 바다는
처음부터 한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다는 분명 섬을 위해 펼쳐진 날개일 거다
섬은 바다라는 날개를 달고
오대양 육대주를 가고픈 만큼 날아갈 수 있다.
섬의 그리움은 수평선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바다가 섬을 놓아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섬은 제 스스로 그리움을 만들어 바다에 뿌린다.
아름다운 구속
너로 인해 나는 존재한다.
♧ 고요 - 김순선
바람이 분다
그러나
큰 나무는
동요하지 않는다
고요가
나를 흔든다
♧ 신 한림별곡 - 김영란
전갱이 잔뼈 같은 어젯밤 하얀 꿈도
북제주 수평선도 가로눕다 잡기는
은갈치 말간 비린내 눈이 부신 이 아침
바람소리 첫음절이 귤빛으로 물이 들고
닻들도 기도하듯 조용히 기대 누운
기우뚱 포구에 내린 오십견의 저 바다
우리가 불빛들을 희망이라 말할 때
행성처럼 떠도는 비양도 어깨 위에
등 뒤로 가만히 가서 손 한 번 얹고 싶다
♧ 망장포* - 김영숙
겨울무청빛이다 설밑 망장포는
옥돔 주낙 나간 남편 서른 해를 기다려
망장포 선인장이 된 사촌 형님 눈빛도
파도가 깎아 먹어 개맡*은 생겼다지만
여인의 파인 볼은 누가 깎아 먹었을까
볼우물 귀엽던 뺨에 피자두색 노을 고여
망쟁이, 너는 알지, 속 시원히 말해봐
든 줄도 몰랐었다는 뱃속의 쌍둥이 녀석
아버지 바다를 본다, 제삿날 포구에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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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장포 : 예전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 이곳에서 왜구의 동태를 살펴 봉화를 올리는 등 방어시설이 있었던 데서 「망장포」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망장포를 망쟁이라고도 부른다.
* 개맡 : 마을의 포구를 이르는 말이다.
♧ 비내리는 애조로* - 김정숙
너를 향한
내 마음은 언제나
초보운전
집중하면 할수록
이른대는 중앙선에
가슴이
잡은 핸들을
어찌하란 말이냐.
---
* 애조로 : 제주시 조천읍과 애월읍을 잇는 우회도로.
♧ 오리 날다 - 김진숙
나, 이제 병든 계절을 지우려 한다.
무심히 벚꽃 나리는 버스정류장 근처, 낮부터 취기
오른 편의점 간이탁자에 부르튼 꽃잎 한 장을 잔속에
얹히다 말고, 잠이 든 중년 남자의 움푹 파인 계절 속
으로 때 절은 오리털 파카 그의 기록을 훔쳐본다. 삐
죽이 실밥 사이로 갓 부화한 오리들과 노숙에 익숙한
꽃들이 깃털 한 장씩 내보이며, 서둘러 꽃을 지우려 한
다. 붙임성 없는 봄날,
난만히 세상 밖으로 날갯짓 저 오리 떼.
♧ 활 - 이애자
사는 게 왜 이렇게 팽팽해야 하는가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열두 달 돌려막기로 삶을 조율하는 나
기본에 충실하라고 어깨 힘을 빼라고
한겨울 매운 선율에 귀를 열어 두라고
부르르 삭정이 끝을 긋고 가는 모슬포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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