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의 추위가 좀 풀린 날 ‘우리詩’ 12월호가 왔습니다. ‘우리詩 칼럼’ 조병기의 ‘불안한 시대의 편지’로 시작되며, ‘신작詩 18인 選’은 송명호 송문헌 최찬용 리상훈 권순자 박은우 정원숙 이정원 이재부 권동지 정진혁 이사랑 박홍 한문수 김대호 정선희 채영조 황서희의 시로 꾸몄습니다.
‘특별기획 연재시詩’ 일곱 번째로 홍해리의 ‘치매행致梅行’이 이어지고, ‘테마가 있는 소시집’으로는 김경선의 ‘시소증후군’외 9편을 시작노트와 함께, ‘한시한담’은 조영임의 ‘퇴계 이황과 담양’, 양선규의 ‘인문학 스프’는 ‘소설가의 사명’을, ‘시 읽기, 수필 읽기’는 김승기의 ‘일상의 삶의 곧 시詩다’와 진석규의 ‘윤집궐중’을 올렸네요.
끝으로 ‘신인 추천 당선 작품’을 실었는데, 김명자와 김현주 두 분의 작품입니다. 시 몇 편을 골라 한겨울에 눈부시게 빛나는 흰애기동백으로 꾸밉니다.
♧ 탁풍托風 - 송명호
속세에 갇혀
걸어가고 있으니
오행五行에 산다지 마소
우주홍황에 맡긴 몸이라……
천지현황에 붙긴 붙었소
어디 간들 장지葬地가 아니랴
고비사막에 엎어지겠소
모랫바람이
귀를 막은 후에는
초원을 달리는
바람이려오
♧ 겨울밤 - 송문헌
얼어붙은 서울의 한밤중 속으로
멀어져가는 저 소리
먼먼 고향으로 날 데려다 주고
잊었던 골목길엔
떠나간 동무들이 하나둘 모여드네
웅이, 석주, 명희, 걸구,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찹싸알~ 떡!”
되돌아 달려오는 아득한 옛 시절
♧ 달랑, 달랑달랑 - 최찬용
미리 말하지만
남자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달랑, 그것 하나를
달랑달랑 흔든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달랑 하나
나의 근간이 되고 중심이 되는 그것은
모가지 위에도 없고
모가지 밑에도 없다
찾으래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촉박하게 다가온 시간 앞에서는
늘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모가지 위에서든
모가지 밑에서든
보이지 않아도 위태위태하다는 것이다
위태위태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기에
그 목숨 줄기에 가까스로 매달리는 생의 뿌리
또는 사연들
눈물겹도록 아름다울 수밖에
달랑, 달랑달랑한 것의
달랑, 달랑달랑한 것이
♧ 사랑의 방식 - 권순자
장맛비가 진종일 내리는 날
소년이 결석을 했다
소년을 찾아 문을 두드리니
사각의 방에 용수철처럼 돌출되어 온 두 사람의 형체
후줄근한 중년의 남자는 얼굴이 붉게 물든 채 누웠고
소년은 술 주전자를 치우고 냄비를 치운다
비가 오면 아빠는 일을 못해요
그래서 비오는 날에 술 마셔요
제가 술 사다드려야 하구요 곁에서 돌봐드려야 해요
사각의 방에 달랑 두 사람과 옷 두어 가지
냄비 두 개
풍로 한 개
비가 술이 되는 날
그는 술에 젖어들고
소년은 아버지가 안쓰러워서
젖는다
그 사각의 방도 술에 젖어서
안개처럼 뿌옇게 슬픔이 피어오른다
♧ 언言 - 정원숙
세상에서 가장 천박한 계륵이다. 내 마음과 그 마음이 시기하고 저 마음과 이 마음이 서로 염탐한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식탁 위에서 열두 개의 손가락과 천 개의 표정으로. 내 마음은 삼십 분 전과 다름없는데, 네 마음은 십 분 전과 다르고, 당신 마음은 저 마음을 열어젖히려 안간힘을 쓰고, 모자를 쓴 당신은 백 개의 모자를 숨기고 장갑을 낀 너는 네 생의 서문序文을 자꾸 수정하고. 나를 열어 봐, 나를 파헤쳐 봐, 선풍기 날개 사이로 언뜻언뜻 스치는 우리들의 이미지. 그 날갯짓에 싹뚝싹뚝 잘려나가는 우리들의 숨겨진 마음. 보이는 모든 것이 그림자다.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읽히지 않는 책이다. 내가 폐쇄적이라서 너는 직선적인가 그래서 당신은 내성적인가 입으론 발가벗고 마음으론 무덤을 꾹꾹 눌러 다지는, 세상에서 가장 척박한 기투企投이다. 내 마음과 그 마음이 오독된다. 저 마음과 이 마음이 서로 부딪쳐 피 흘린다.
♧ 가슴으로 지는 달 - 이재부
하나뿐인 달
만월이 지나고부터 점점
커지는 안달
해를 만나
결혼하라는 부모 권유는
하늘 메아리다
해 없는 달
캄캄한 그믐달이 달이냐고
경 읽는 안달
먼 하늘 길
어두운 밤길을 혼자 어이
가려는지
늙어버린
부모의 애타는 가슴으로
안달마저 지고 있다.
♧ 분가分家 - 황서희
최초의 分家는 아기집 빠져나오는 날
최후의 分家는 몸에서 내가 빠져나가는 날
그 사이,
가볍게 살더라도 겉돌지는 마라
어디를 간들 살림을 피워라
걱정스러운 집에서
집까지
눈물을 날리는
참 가벼운,
♧ 행복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 65
아기가 엄마 품에 파고들 듯이
아내가 옆으로 들어와 팔베개를 합니다
그냥 가만히 안고 있으면
따뜻한 슬픔의 어깨가 들썩이다 고요해집니다
깊은 한숨 소리 길게 뱉어내고
아내는 금방 곯아떨어지고 맙니다
마른 빨래처럼 구겨진 채 잠이 듭니다
꽃구름 곱게 피어날 일도 없고
무지개 뜰 일도 없습니다
나도 금세 잠 속으로 잠수하고 맙니다
생生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보다
가벼워도 무거운 아내의 무게에
슬그머니 저린 팔을 빼내 베개를 고쳐 벱니다.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정자 시집 ‘시간을 밀고 간다’와 이끼 (0) | 2014.12.13 |
---|---|
‘우리詩’ 12월호의 시와 백량금 (0) | 2014.12.12 |
‘잠수… 그리고 우리’와 동백꽃 (0) | 2014.12.03 |
제주작가의 시조와 노박덩굴 (0) | 2014.11.28 |
‘우리詩’ 11월호와 제주수선화 (0) | 2014.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