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겨울호와 제주수선화

김창집 2015. 1. 15. 09:20

 

‘제주작가’ 겨울호가 나왔다.

 

* 포토에세이 - 김진철

* 특집 - 멋들어진 제주문학관을 위하여

* 2014 제주작가 신인상 수상작 발표

* 공간과 연대 - 류국광

* 시 - 문충성 김수열 양영길 김경훈 김세홍 진하

         김영미 김상신 김문택 김순선 현택훈

* 시조 - 오영호 한희정 김영숙 홍경희 김영란

* 단편소설 - 양혜영

* 연재동화 - 김섬 들꽃(4)

* 수필 - 양남수

* 육성기록 - 고영진 구럼비는 살아있다(4)

* 길따라 떠나는 김광렬의 제주기행(3)

* 제주어 산문 - 오영호

* 서평 - 강영기 정찬일

 

그 중 시 몇 편을 골라

제주수선화와 곁들인다.

   

 

♧ 돌계단 오르며 - 문충성

 

처음

이 돌계단을 오르며

별생각 다 했다

천국으로 가는 길

어디 없을까

한참 오르다보니

지쳐서 못 오르겠다

뒤에서는 세치기하겠다

빵빵 소리 지른다

빨리 오르라고

   

 

♧ 김남주 시인 생가에서 - 김수열

 

  민족시인 김남주 20주기 추모행사 가던 길에 그의 생가를 들렀는데 대체 어찌된 일인가 김남주가 20년 전에 세상을 버린 김남주가 난간에 걸터앉아있는 게 아닌가

  해남농민회장으로 집회장마다 머리띠 매고 앞장선다는, 그의 막내아우 덕종이가 김남주처럼 빙긋이 웃으며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제주에서 왔다는 말에, 뭐시오? 제주에서 왔다고라? 하, 제주 허면 열불이 나분당께. 시방도 눈물이 날라헌당께. 강정땜시 멫 번 다녀왔제이. 하, 강정. 저 어째쓰까이? 칵 죽여불도 못 허고 조사불도 못 허고. 어째쓰까이, 저 강정.

   

 

♧ 고향 이름이 사라졌다 - 양영길

 

70년대 댐이 들어서면서

고향이 물속으로 잠겨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군대시절 친구가

내 고향집에 잠깐 와 있었다

댐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 참던 친구가

40여 년 세월 군대 이야기 뒤로 하고

폐가가 되어 버린 내 고향집을 손보고

잠시 주저앉았다

고향집에 사람의 온기가 돌면서 나는

옛 시절 어린 꿈을 되찾은 아이가 되고 있었다

 

풍성한 한가위를 맞아

차례 상을 차리겠다는 친구에게

급한 마음에 택배를 보내는데

내 고향집 주소란에

고향 이름이 사라졌다

도로명 주소에는 읍면만 나오고

호적에도 버젓이 올라 있던 이름인데도

작은 마을이라고 지워버렸다

세상이 바뀐 게 아니라

세상을 억지춘향으로 바꿔 버렸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꾸던 꿈마저 바꿔야만 하는 것일까

 

친구의 아내가 먼 길을 건너 찾아왔는데

주소만 가지고는 버스도 택시도 모르겠단다

노부부는 하루 종일 이산가족이 되어

속 터지게 헤매고 다녔다

촌동네 살면서 고향의 여린 꿈은

역사의 치매같은 잊음이 있어야

꿈꿀 수 있는 것일까

   

 

♧ 아무도 없었다 - 김경훈

   -진도 팽목항에서

 

거기 방파제 중간쯤

주인 잃은 신발들만

걸음을 멈추고

아무도 없었다

모든 걸 삼킨

바다에도

이어중간 구름길 바람길에도

피울음 삼킨

먹먹히 에인 가슴들만

빈 하늘에 나부끼고

거기,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조난된 정부

해체된 국가만

비닐쓰레기로 날리고 있었다

 

 

♧ 싸락눈이 차락차락 - 김세홍

 

大寒지나

마당의 연산홍이 꽃을 피웠다

싸락눈이 차락차락

 

네게 눈길 준 이가 대체 누구더냐

 

오늘도 동료 하나가 뽑혔네

살매 들린 바람 빌려 무들이 살풀이를 한다

싸락눈이 차락차락

 

이 집 노모의 뱃속도 천국이거늘

 

백 살된 항아리에도

싸락눈이 차락차락

 

그댈 빚은 손의 안부를 묻지 말라

 

우듬지 말라붙은 감꼭지에도

싸락눈이 차락차락

 

물컹한 과육을 못 잊는 까치가 있구먼

 

자, 올해 신수나 함 볼까나

싸락눈이 차락차락

   

 

♧ 팽목에서 목이 메다 - 진하

   -아비의 절규

 

네가 있을 때는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네가 떠나고 나니

남은 것은 가난뿐이구나

   

 

♧ 수묵담채 - 김영미

 

고랑고랑 콧소리 내며 잠든

늙은 어미 손톱 밑이 검다

볕드는 현관에 바람 벗 삼아 앉아

굽은 등 수십 번 펴고 두드리며

고구마줄기를 벗기다 들었을

풀빛이 검다

잠이 든 어미 곁에 놓인

검은 비닐봉지 셋

희었다가 푸르다가 검어지던

가슴 아린 줄기들이 얼기설기

소복이 들어있다

진종일 어미는

고구마 줄기를 익은 된장에 무쳐내던

가을 밥상을 그렸을 것이다

보름밤을 하얗게 도려낸

가을 달빛이

고구마줄기처럼 휘었던

어미의 등을 주무르고 간다.

   

 

♧ 해남 터미널에서 - 김상신

 

온 몸이 구겨진다

지팡이 위로 늙은 몸뚱이가 쏟아져내린다

한 손을 탈탈탈 털며

풍 맞은 노인네가 약봉지를 들고 지나가신다

 

저쯤 되면

사는 일이라는 게 한 폭 그림으로 걸려도 좋을 나이

 

노름 좋아하는 박가도

술과 계집질로 몸 삭은 이가도

병원 동기들을 사이에 두고 앉아

금방이라도 비상할 듯 羽化(우화)중인 노구를 애써

붙들고 계신다

지팡이 하나로 남의 생의 중력을 거스르고 계신다

 

탈탈탈

공 튀기듯 바람 맞은 꽃잎들

대합실 의자에 바닥에 흩어져

 

봄을 내려놓고

신생(新生)의 몸을 싣고 갈 군내버스를 기다리며

오래된 풍경처럼 눈 흐려지는 바닷가

남쪽,

생이 순환하는 버스터미널에서

다시 걸음마를 배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