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앤율 동인이 시집 제2호 ‘달빛을 베다’를 냈다.
1년 동안 썼던 작품들을 10편씩 모아 엮은 이 시집은
그 후기에
“눈송이처럼 폴폴 날리는 시의 향기가 눈이 녹아 스며들 듯,
누구에겐가 다가가 그렇게 시도 스며들리라.”고 썼다.
고성기 권재효 송창선 안상근 양민숙
이명혜 이무자 이소영 장승심이 그 동인이다.
시 한 편씩 골라
벌써 봄소식을 알리는 별꽃과 함께 올린다.
♧ 달빛을 베다 - 권재효
-달빛 이미지 7
내 마음 속 너도밤나무 숲
달빛 하얗게 쏟아지는데
설핏, 스쳐가는 그림자
몸은 아니 오고 그 사람
그림자만 살째기 다녀 갔나베
어쩌라고 너도밤나무 숲에 자꾸
달빛만 쏟아지는데
쓰윽싹 쓰윽싹
칼 가는 소리
한참 후에 보니
내가 달빛을 베고 있었다
칼날에서 뚝, 뚝, 떨어지는 달빛
내가 번뇌를 베고 있었다
♧ 영실 흰제비꽃 - 송창선
사월
영실을 오르자면
바위 기스락에 발길을 피한
흰제비꽃을 만나야 한다
앞이 코에 닿을 듯 가파른 숲길
허위허위 올라 능선길 따라
가쁜 숨으로 수그러드는
그 꽃자리에서
바스러지는 지반을 받치는
통나무 계단 한 밑둥을
등으로 밀면서 피워 올린
그 오기를 만나야 한다
♧ 제주의 바람은 무늬가 있습니다 - 안상근
제주의 바람은 무늬가 있습니다
바다에 가면 그것을 맛보지요
제주의 바람은 무늬를 가지고 옵니다
오름에 오르면 그것을 듣지요
제주의 바람은 무늬를 놓습니다
나무를 보면 그것이 보이지요
제주의 바람은 무늬를 가지고 떠납니다
올레를 걷다보면 그것이 흐르지요
제주의 바람은 무늬가 있습니다
돌담을 보면 그것이 잡히지요
오늘도
바람 무늬가 내 고향 제주를 감싸고돕니다
폭낭* 아래 건불령**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주의 바람은 사람 이야기를 몰래 엿듣고 있습니다
---
* 폭낭 : ‘팽나무’의 제주어, ‘퐁낭’이라고도 함
** 건불령 : ‘땀 좀 식혀서’의 제주어
♧ 다시 물드는 법 - 양민숙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다가
자판기커피 한잔 마셨어
단물 빠진 껌 속에
스며든 커피
씹을수록 커피맛이 나
씹을수록 커피향이 나
아카시아향 껌이었는지
커피맛 껌이었는지
헷갈리기만 하던 그 날
다시,
네게 물들어 가나 봐
♧ 남은 자의 辯 - 이명혜
허전하지…
어떠셨느냐는,
별리를 겪은 그 해 가을
잠시 뜸을 두더니
하늘을 보며 넋두리처럼
허전했지. 한 마디
문득 떠오를 때마다
남은 하루가
무
너
지
다
그림자 저편 - 이무자
철없고 서툴러 넘어지고 깨지는
지난 시간 보듬어주던
울퉁불퉁한 손등으로
소리 없이 풍기는 따스한 전율
나뭇잎 사이로 이는
시린 새벽바람에 옷깃 여미며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여인은
흐르는 강물에 찰랑이는 머릿결
백발서리로 곱게 동여매고
골바람에 노을빛 곱게 물들이며
멀어져간 그림자 저편에서
은빛 꽃가루 같은 미소뿐 말이 없으시다
♧ 시, 들어간다 - 이소영
명주실에 지워진
어느 가야금 명인의 지문
긴 약력처럼 선명히 찍힌
지문조차 부끄러운 날
내 안을 재검색하다 알았네
깊고 실한 뿌리 내리지 못한 채
서둘러 시의 꽃만 피우려다
시들어
시, 들어간다는 걸
♧ 햇빛 조명 - 장승심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에 시를 읽는다
해 갈수록 어두워
멀어지던 책읽기
오늘은
환히 보인다
시인의 마음속까지
♧ 제주 건천 3 - 고성기
활활 타는 산
잠재운 게
비
바람마닝랴
흙탕물도
세월이
담긴 만큼 맑아지는 걸
깊게 팬
가슴팍에도
제주감꽃 참 붉다
<>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압화로 피다 - 이윤승 (0) | 2015.01.18 |
---|---|
제주작가 겨울호와 제주수선화 (0) | 2015.01.15 |
‘우리詩’ 1월호와 수선화 (0) | 2015.01.11 |
김세홍 시집 '소설 무렵'과 유리호프스 (0) | 2014.12.30 |
김정자 시집 ‘시간을 밀고 간다’와 이끼 (0) | 2014.12.13 |